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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연재39] 충무로별곡

기사승인 2016.10.27  09: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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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나저나 선배가 노조를 탈퇴한 진정한 의미는 뭐죠?”

[골프타임즈=박하 작가] 이한무가 그 틈에 박승례를 힐끔 쳐다본다. 아니꼽다는 무언의 경고이다. 하지만 박승례는 그런 이한무 쯤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오히려 가소롭다는 듯이 입술을 삐쭉거린다.

여기자들이 자기들끼리 수군거리고는 낄낄 웃는다. 그것은 일종의 대리만족이다. 계약직인 관계로 노동조합에 가입할 수 없는 그녀들의 불만이 자연 노출된다.

언젠가 한번 박승례를 비롯한 몇 명의 계약직 여기자들은 단체로 노조 위원장을 찾아가 상담한 적이 있다. 자신들이 남자들과 똑같이 일하는데 왜 불이익을 주냐고 항의했다. 무엇보다 돈에 예민한 여자들로서는 당연한 욕심이다. 그러나 아이들은 보기 좋게 거절당했다. 그녀들의 고충을 인정하는데도 어떻게 해결해 줄 수 없다는 얘기만 들었다. 한마디로 보이지 않는 거대한 벽을 실감한 셈이다. 게다가 나중에 노조 사무실을 찾아갔다는 얘기가 돌아 이 부장에게 싫은 소리까지 들었다.

여기자들은 그 다음부터 노조 사무실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대학에서 한때 소위 운동권으로 거들먹거렸던 그녀들도 그 이후 많이 달라졌다. 운동과 노동이 어쩌고저쩌고 하며 함부로 논하지 않았다. 그 대신 이따금 빨간 띠를 두르고 과격한 언어를 구사하는 노조 간부들에게 쓴 미소를 던졌다.

특히 노조 활동에 적극성을 띠고 있는 정식 여기자들에게는 우수 어린 눈길을 주었다. 영원히 따라잡을 수 없는 황새를 바라보는 그윽한 촉새의 그런 눈망울이다. 물론 황새가 촉새의 서글픈 마음을 영원히 이해할 수 없을 터이다.

역시 박승례는 함봉호에게 원고 마감일 저녁 여기자들과 술 한잔하자고 제의했다. 박승례는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게 사내전화로 함봉호에게 전화를 걸어 왔다. 옆자리의 구본하가 들을까 봐 주의를 기울였던 것이다. 어느새 구본하도 여기자들에게 따돌림을 당하고 있었던 셈이다.

구본하는 여민수의 그것과는 좀 다른 면에서 여기자들에게 미움을 받고 있었다. 워낙 내성적이어서 말이 없는 여민수와 달리 구본하는 말이 많아 화를 자초했다. 말만 많은 것이 아니라 사람들 사이를 벌어지게 만드는 것이 문제였다. 그런 류의 인간들이 부지기수로 득실거리는 곳이 이 신문사 조직이다.

부원들은 제각기 원고를 막기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취재하느라 약속한 날인 금요일이 어느새 눈앞에 왔다. 함봉호도 마찬가지였다. 이번에 맡은 기사는 ‘서울 근교 가을 단풍 나들이’여서 발품을 제법 팔아야 했다. 함봉호에게는 차라리 그것이 편했다. 노조 탈퇴서를 제출한 이후 심기가 불편한 탓에 타부서 직원들과 부딪치는 것조차 싫었다.

함봉호는 여기자들이 퇴근한 지 10여분 정도 지난 다음 사무실을 나갔다. 밖으로 나오는데 구본하가 한잔하자고 꼬드겼지만 약속이 있다며 뿌리쳤다. 물론 구본하는 원고를 막은 기념으로 의례상 한 말이다. 느낌으로 보아 여기자들과의 술 약속을 눈치 챈 듯싶지는 않다. 하지만 워낙 여우같은 구본하였기에 함부로 안심할 수 있는 처지는 못 된다. 그래서 밖으로 나와 헤어질 때 약속 장소로 가기 위해 적당히 둘러댄다. 아내와 모처럼 외식하기로 했다는 있지도 않는 말도 가미한다.

약속 장소는 처음부터 술판을 벌이기에 딱 알맞은 민속 주점이다.

“함 선배, 여기요! 여기!”

어두운 실내 구석에서 박승례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함봉호가 들어섰을 때는 이미 여기자들이 파전과 묵을 안주로 동동주를 한잔씩 걸친 상태다. 겨우 10분 사이인데도 조아라는 제법 올라 있다. 술이 약한 편인 조아라가 좀은 서둘러 마셨던 모양이다.

“어, 조아라는 벌써 취했나?”

“헤…, 선배!? 이 정도 가지고, 뭘요.”

조아라가 함봉호의 농에 딴죽을 건다.

“함 선배, 혹시 구 선배가 따라오지 않던가요?”

“미리 내가 제지했지. 따라오면 술맛 떨어진다며?”

“역시 선배가 최고야, 파이팅! 자…, 선배, 한잔 받아요.”

박승례가 다짜고짜 함봉호에게 동동주를 한잔 따른다.

“함 선배, 사랑해요.”

“아니, 웬 사랑 타령?”

“헤헤, 선배가 총각이라면 내가 찜하는 건데….”

이번에는 홍미혜가 술기운을 빌려 용기를 낸다.

“야, 홍미혜! 선배는 내 거야!”

김은주가 한 술 더 뜬다.

“야, 이제 그만! 선배가 어디 동네북이냐!?”

“…….”

“이번에 우리의 가슴을 속 시원하게 해줬다고, 맘먹으면 안 돼~ 쥐!?”

그러자 박승례가 교통통제를 시원하게 한다.

“선배, 그거 노보 아니에요?”

박승례가 어느 틈에 함봉호의 손에 들려 있는 노동조합 소식지를 보고 한마디 한다. 역시 눈치 하나는 엄청나게 빠른 계집애다.

함봉호는 회사를 나오다가 현관에 있는 노동조합 소식지를 한 장 가지고 왔다. 물론 약속 장소로 걸어오면서 재빨리 ‘조합원 동정’란을 훑어보았다. 역시 예상했던 대로 자신의 노동조합 탈퇴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 그와 달리 새롭게 노동조합에 가입한 신입사원들의 명단은 잘 실려 있다.

함봉호는 그런 노보를 보고 새삼스럽게 쓴 미소를 짓는다. 어느 정도 감은 잡았지만 탈퇴 사실을 밝히지 않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결국 그들의 위선을 확인한 셈이다. 함봉호는 그것이 오히려 편했다. 그래서 절로 웃음이 나온다.

“그까짓 노보 무엇 하러 보세요!”

박승례가 따스하게 위로한다.

“재밌잖아?”

함봉호가 적당히 빈정거린다.

“재밌긴 뭐가 재밌어요? 그나저나 선배가 노조를 탈퇴한 진정한 의미는 뭐죠?”

홍미혜가 술을 한잔 권하며 묻는다.

“음…, 놈들의 위선을 확인하기 위해서.”

“좀 어렵네요. 무슨 말인지….”

“이 노보를 봐. 내 이름이 없잖아. 내가 탈퇴한 사실을 쓰지 않았어.”

“그래요? 어디 한번 줘 봐요.”

홍미혜가 노보를 받아들고 뒷장을 읽는다.

“어?! 정말 선배 이름을 안 넣었네! 정말 웃기는 짬뽕들이군.”

“어디 봐, 이리!”

박승례가 재빨리 노보를 낚아챈다.

“정말 그러네. 역시 위선자들이군. 나쁜 놈들! 노조 가입자 이름은 넣고 탈퇴자는 안 넣는 법이 어디 있어!? 그래, 이러고도 진정한 노동운동을 한다고 떠들고 다니는 거야!”

“그래, 앞으로 몇 년 후 이 잘못된 노조 운동 때문에 우리나라가 엄청난 손해를 볼 거야. 그 날이 언젠가 모르지만…, 비정규직과 정규직 사원, 비노조원과 노조원의 갈등이 결국 화를 부르겠지.”

“와, 선배는 예언가 기질도 있었네.”

“자, 그만 열 받고…! 술이나 한잔하자고.”

함봉호가 나서서 솟구쳐 버린 화를 진정시킨다.

“그래요. 그까짓 위선자들 얘기해 봤자 입만 아프지. 자, 선배의 노조 탈퇴를 다시 한 번 축하하면서! 건배!!”

여자들의 잔이 부나비처럼 함봉호의 것에 일제히 덤벼든다.

그와 함께 박승례의 푸짐한 젖가슴이 함봉호의 어깻죽지에 와 닿는다. 함봉호는 순간 움찔했지만 그냥 못 이긴 척하고 건배한다. 박승례는 그런 면에서 좀은 둔한 편이다. 자신의 젖가슴이 얼마나 풍부한 밑천인지, 게다가 사내놈들이 그것을 주제로 얼마나 희희낙락하는지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다.

함봉호는 그 틈에 서둘러 여자들의 눈빛을 읽어 본다. 오늘 따라 좀 걱정이 된 탓이다. 여기자들의 기분이 다운되어 금방 취하지 않을까 싶다. 그 중에서도 조아라의 눈빛이 가장 풀려 있다. 함봉호는 그런 모습을 보고 문득 박창세의 얼굴을 떠올린다.

아무래도 조아라는 자신이 저지른 행동이 얼마나 바보 같은 짓이었던가를 한탄하고 있을 성싶다. 그 바람에 다른 그 누구보다 더 빨리 취할 수밖에 없을 터이다. 지독한 위선의 탈을 쓰고 있는 노동조합의 현주소를 확인하고 심한 절망감을 느꼈을 법하다. 그런 사실도 모르고 정식 직원이 되기 위해 아무런 힘도 없는 총무과 박창세에게 몸 주고 마음을 주었으니…. 차라리 박철수 실장에게 바치는 것이 훨씬 더 효과적이었을 텐데. 함봉호는 쓸데없는 생각이라며 머리를 흔든다.

“자, 우리 이차 갈까?”

“선배, 우리 오랜만에 노래방에 가요.”

“그럴까?”

“선배, 집에 전화해요. 언니한테 늦는다고…. 하지만 나랑 브루스 췄다는 말은 하지 말고….”

박승례가 한 술 더 뜬다.

어쩌면 오늘밤은 광란의 밤이 될 듯한 분위기이다. 함봉호와 여기자 일행은 자리를 박차고 밖으로 나온다. 밤거리가 온통 노래방 네온사인 일색이다. 박승례가 다정한 연인처럼 함봉호의 팔을 빼앗아 팔짱을 낀다.

어디선가 슬픈 웃음이 흘흘 기어 나온다. 팔꿈치가 웃는다. 녀석이 오랜만에 기분이 좋단다. 노조를 탈퇴한 기념 치고는 너무 호사스럽다. 함봉호는 이런 모습을 아내에게 보여주고 싶은 생각이 문득 머리를 스친다. <계속>

박하 작가|master@thegolf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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