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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연재12] 셰익스피어가 들려주는 두 개의 장례식을 위한 발라드

기사승인 2017.01.09  00: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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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맛에 어려운 문자들을 쓰고…

[골프타임즈=김기은 소설가] 마르크스가 이런 현상을 다른 맥락에서 논의하고 있다는 것은 명확하다... 이러한 변동이 사회의식에 어떠한 결과를 야기했으며, 어떠한 결과를 초래할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큰 의의를 갖는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모순되는 경향이 있다... 자본주의에 대한 마르크스 이론은 암묵적으로, 때로는 노골적으로 무시되고 있다... 그러나 적어도 한 가지 사실. 신조와 행동에 표현된 사회집단의 실제 의식이 단순히 ‘심리적’ ‘허위’의식으로 규정돼, 공산당의 이데올로기로 표방된 ‘합리적 의식’과 대비되던 시대는 이미 오래전에 지나가버렸다는 사실만은 명백하다.”

하지만 명확하고 명백하다는 말조차 내게는 명확하지 않았다. 그리고 237쪽에서 마지막 문장이 끝났다.

“이러한 상황에 대처하기 위하여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평등주의 사회에 적합한 제도의 견지에서, 그리고 그동안 겪어왔던 상처의 아픔이 없이도 사회주의를 실현할 수 있는 정치적 행동과 사회운동의 견지에서 사회주의를 재고하는 일이다.”

재고하라니? 다시 생각하란 말 아닌가? 여태 ‘불분명 하다’며 237쪽이나 되게 계속 지껄여대더니 이젠 다시 생각하란다. 그리고 이 마지막 말조차 내게는 불분명했다.

‘자, 이제 어찌됐든 이제 이 한권을 원고지 열 장으로 정리해야 한다.’

237쪽의 책 한권 속에서 보토모어는 마르크스, 마르크스를 연구한 루카치며, 프로이드, 또 다른 수많은 학자들의 글을 수도 없이 갖다 붙여놨고, 명백함과 불분명함을 따지며 어쩌고저쩌고 하고 떠들어댔다. 이젠 내 차례였다. 그렇게 떠들어 댄 것들을 또 적당히 떼어서 붙여놓고, 내 이 불분명한 지식과 느낌을 총 동원하여, 글들을 정리하고 명백함과 불분명한을 따지며 또 어쩌고저쩌고 떠들어 대야 했다. 마치 초등학교 국어시간에 하던 ‘말 전달하기’를 하는 것 같았다.

제대로 못 알아들어 불분명한 말을 고개를 갸우뚱 하며 전달하고, 전달하다 보면, 점점 말이 이상해지고, 고개를 갸웃하며 뭔가 내가 알아들은 상대의 말이 문맥상 이상하다 느끼면서도, 그런 채로, 어쨌거나 전달해야 했던, 그러다 머리가 좀 돌아가는 친구들은 미심쩍어 좀 생각해보다가 아예 자신의 판단대로 말을 바꿔 전달해 버리기도 했다. 그러다보면 맨 끝 친구는 처음 친구가 했던 말과는 완전히 다른 어이없는 말을 했다. 내 글도 그렇게 흘렀다.

원고지 10장을 채우기 위해 읽고 또 읽었다. 머리에선 쥐가 나는 것 같았다. 다시 쓰고 또 다시 썼다. 토할 것처럼 머리가 지끈 거렸다. 그럼에도 어쨌든 다음 회합 날에 마쳐 원고지 10장을 채워 들고 갔다. 난생처음 그토록 어려운 말을 지껄여대는 나 자신에 대해 놀랍도록 뿌듯하고 대견했다.

갑자기 엄청난 지식인이 된 거 같았다. 누군가를 붙들고 마르크스가 어쩌고 급진주의가 저쩌고 하며 말해보고 싶었다. 이래서 지식인들이 잘난 척하며 어려운 말을 쓰나보다. 옆에 친구라도 있다면 보여주고 으쓱해 하고 싶었다. 이런 맛에 어려운 문자들을 쓰고, 말을 꽈배기처럼 꼬고, 학자들의 말을 잔뜩 인용하고 그러는가보다.

대학은커녕 중학마저 겨우 졸업하고 고등학교마저 중퇴해야 했던 내 친구가 봤으면 엄청 기죽었을 거 같았다. 아니, ‘마르크스’란 말에 손발을 오그리며 경기를 하고 쓰러지거나, 징그러운 뱀이라도 본 듯 삼십육계 도망쳤을 수도 있다. 끼리끼리 논다고 내 친구들 수준이 다 그랬다.

그 친구는 자칭 과거 전라도 양반가의 굉장히 좋은 집안의 자손이다. 하지만 삼촌들이 억울하게 교수간첩단 사건에 연루되면서 온 일가가 하루아침에 풍비박산이 되었고, 집안의 제일 막내였던 그 애 엄마마저 인생이 완전 꼬여버렸단다.

그 애 엄마에겐 훗날 결혼을 약속한 사랑하는 남자가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간첩단 사건으로 오빠가 잡혀가면서 장차 시아버지가 될 사람인 경찰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임신까지 하여 동네에서 빈 몸으로 쫓겨났단다.

부잣집 딸로 곱게만 자라왔던 그 엄마의 인생이 그때부터 떠돌이 개처럼 되어버렸다고 했다. 나는 소설가가 돼서 제일먼저 그 친구 엄마얘기를 소설로 써주기로 약속했었다. 그런데 그만 소식이 끊겼다.

얼마 전에 연락이 되어 물었더니 “조금만 일찍 왔으면 소설로 쓸 수 있었을 텐데. 갖고 있던 일기를 얼마 전에 다 없애버렸어”하며 아쉬워했다. 얘기를 해달라고 했지만 엄마가 치매라고 했다. 더구나 큰 삼촌 둘은 수십 년이 지나 얼마 전에야 감옥에서 나왔다며, 아직은 함부로 말할 성질이 아니라고 했다.

“못사는 놈은 운이 먼저 알고 꽁무니를 빼는 모양이야.”

나는 사라진 일기를 아쉬워하며 중얼거렸다.

“삼촌들이 정말 간첩이 아니었어. 억울하게 잡혀간 거래. 전에 한번 뉴스에 나왔는데 모르는 구나. 외할머니가 열여덟 어린 나이에 남편을 잃고 젖먹이 아들 하나 데리고 후처로 가서 우리 엄마를 낳았데. 그래서 엄마랑 외삼촌은 극진했었나봐.”

나는 수첩에 메모를 했다.

“본처 자식인 외삼촌들은 나이가 많았고 공부를 많이 해서 서울서 교수를 하고 있었는데, 외할머니가 데려온, 외삼촌은 공부를 못하고 머슴처럼 언제나 천덕꾸러기 신세였어. 그 때문에 그 삼촌이 한이 많고 억울해서 공산당에 빠져들게 됐고, 나중에 빨치산이 돼서 경찰을 피해 도망 다니다 막다른 길에 몰리니까 큰 삼촌 교수실로 숨겨달라고 찾아갔던 모양이야” <계속>

김기은 소설가|master@thegolftimes.co.kr
<저작권자 © 골프타임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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