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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창호의 문화 단상] 커닝이야기, 후안무치한 변명으로 버티는 꼴불견

기사승인 2017.05.09  20:3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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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십 년 고생, 시험지 한 장에 일생 결정

▲ 김홍도의 조선시대 소과응시도(小科應試圖) 과거에도 과장마다 부정행위가 만연하였다.(사진출처 네이버지식백과 화면 캡처)

[골프타임즈=장창호 칼럼리스트] 날씨가 뒤죽박죽입니다. 때 이른 초여름 더위가 당황스럽더니 불청객 미세먼지의 습격으로 산의 신록마저 흐릿합니다. 눈에 힘을 주고 시선을 모아야 먼 산의 윤곽이 그나마 다소 보입니다. 눈에 힘을 주다 갑자기 학창시절 시험시간 커닝(Cunning)이 떠올라 실소를 금치 못합니다. 오늘은 커닝이야기를 하겠습니다.

10년도 지난 일입니다. 친구 몇몇이 퇴직 후 서울로 이사 오신 고교은사를 모시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간의 안부와 감사의 마음을 담아 술잔이 몇 순배 오간 후, 한 친구가 일어나 선생님께 진지한 어투로 학생시절 일을 따져 물었습니다. 고교시절 기말고사 때 커닝을 했다는 죄목으로 교무실에 끌려가 선생님에게 엄청 혼이 났는데 억울했다는 것입니다. 듣는 순간 공감이 되었습니다. 필자도 억울한 당사자였기 때문입니다.

무슨 과목인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시험 끝을 알리는 종이 울릴 때 뒷자리의 덩치 큰 급우 둘이 필자와 친구의 시험지를 빼앗아 급하게 베꼈습니다. 이 광경이 시험감독 선생님께 딱 걸려서 모두 교무실로 끌려갔습니다. 교무실에 네 명이 나란히 무릎을 꿇고 손을 들고 있었고 지나가던 선생님마다 꿀밤을 한 대씩 때렸습니다. 커닝 학생을 단체로 인수받은 담임선생님은 노발대발하며 심하게 매질부터 했습니다. 나중에 감독선생님의 설명을 듣고선 보여준 녀석들이 더 나쁘다며 다시 거의 구타에 가깝게 혼을 내셨습니다. 기실 필자와 친구는 일방적으로 시험답안지를 빼앗겼는데도 말입니다.

“선생님, 그때 왜 그랬습니까? 왜 제 이야기는 듣지 않았습니까?” 친구는 그때의 억울함을 수십 년간 가슴속에 간직했던 것입니다. 은사께선 자초지종을 묻지 않아 오랜 세월 상처를 주어 미안하다고 극구 사죄했습니다. 술이 취한 친구의 주정으로 모처럼 은사를 모신 의미가 퇴색될까 다른 친구들이 서둘러 화제(話題)를 돌렸습니다. 하지만 그날 친구는 잊을만하면 “선생님, 그때 왜 그랬습니까?”를 몇 차례나 반복하며 은사를 곤경에 빠트렸습니다.

억울한 커닝이 있는가하면 어이없는 커닝도 있습니다. 역시 몇 년 전 일입니다. 필자의 교양과목시험을 감독하는데 한 학생이 필자와 자꾸 눈이 마주쳤습니다. 수상해서 곁눈질로 유심히 살폈더니 뭔가를 훔쳐보았습니다. 다가가서 시험지를 들춰보니 깨알 같은 글자로 쓴 커닝페이퍼가 깔려있었습니다.

학칙 상 시험부정행위는 정학처분감이지만 차마 그러질 못하고 시험지를 뺏고 퇴실을 지시했습니다. 그러자 이 학생은 시험 시작 전에 필자가 부정행위금지를 고지는커녕 커닝페이퍼가 발각되면 부정행위에 해당한다고도 고지하지 않았다며 항변했습니다. 더욱 가관인 것은 자기는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페이퍼를 시험답안지 밑에 깔아두었지 결코 보지 않았으며 오히려 필자더러 자기가 커닝페이퍼를 훔쳐보았다는 증거를 대보라고 강변(强辯)했습니다. 후안무치(厚顔無恥)도 이 정도면 요즘 젊은이들 표현대로 국대급입니다.

기실 커닝은 옛날에도 성행했습니다. 조선시대 502년 동안 과거시험이 748회가 실시되었고, 응시자가 선호하는 문과 급제자는 한 해 평균 채 30명이 못되었습니다. “차가운 창문 아래 십 년 고생, 시험지 한 장에 일생이 결정된다네(十年寒窗苦, 一卷定終身).”라는 시에서 보듯이 일생의 영달이 걸리고 급제의 문이 극히 좁다보니 과거시험장에선 부정행위가 빈번했습니다.

눈알 굴려 옆 사람 시권(試卷) 훔쳐보기, 붓대 끝에 커닝페이퍼 숨기기, 측간에 가면서 시권 떨어뜨려주기, 시제(試題) 사전유출이나 필체 인식 등 시험관과 결탁하기, 답안 내용을 대신 지어주는 거벽(去闢)과 전문적으로 글씨를 대신 써주는 사수(寫手)를 동원한 대리시험, 고의로 답안을 크게 읊조려 알려주기 등 갖은 커닝 수법이 동원되었습니다.

나라에서도 극심한 과장부정을 위해 금란관(禁亂官)을 두고 시험부정방지를 위해 애썼지만 쉽게 근절되지 않았습니다. 국왕이 의례히 친림하는 과장(科場)에 국가기강이 되살아났던 영⋅정조 때조차 부정행위가 만연했습니다. 심지어 조선후기에는 과장부정이 조직적으로 행해졌습니다. 과장에서 서로 상부상조하기로 밀약한 ‘접(接)’이란 담합체가 등장하여 과장 앞 좋은 자리를 ‘선접꾼’이 선점했습니다.

지금의 아파트청약이나 신형 스마트폰 구입을 위해 밤새 줄서는 광경을 연상하면 됩니다. 과장 앞자리에서 먼저 답안을 제출해야 급제할 확률이 높기 때문이었습니다. 과거응시자가 워낙 많아 채점관들이 먼저 제출한 5, 6백명의 시권(試卷)에서 급제자를 고르는 일이 비일비재한 데서 생긴 폐단입니다.

오늘 대선을 치룹니다. 선거가 끝나면 숱한 하마평(下馬評)과 함께 많은 대학교수들이 고위직후보로 등장할 것이 뻔합니다. 유력 후보의 캠프가 대학교수들로 넘쳐난다고 하니 말입니다. 그리고 교수들이 논문표절이나 제자논문 뺏기 등의 덫에 걸려 낙마하는 불행을 심심찮게 목도합니다.

명백한 부정행위로 학생들의 커닝보다 사안이 더 큽니다. 교수들이 커닝이나 일삼는 집단으로 사회에 그릇 각인될까 적이 걱정됩니다. 다음 정권에 발탁될 대학교수는 커닝과 같은 부정행위와 상관없는 깨끗한 인물이 선정되어 사회적 물의의 주인공이 되지 않길 미리 축복합니다. 또한 정파적인 이해관계에 의해 억울하게 커닝교수로 매도당하는 희생양도 없어야 하거니와 명백한 커닝을 후안무치한 변명으로 버티는 꼴불견도 사라지길 염원합니다. 미꾸라지 몇 마리가 연못 전체를 흐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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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창호 칼럼리스트|master@thegolf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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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문학박사, 칼럼리스트]

※ 본 칼럼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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