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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국 4千字 소설 제8화] 아름다운 밀월

기사승인 2017.08.22  07:2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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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의 생 마지막을 선생님 품에서

[골프타임즈=정병국 작가] 볕 바른 바위에 핀 진달래 꽃잎을 땄다.

선생님이 아침 일찍 점심을 같이 먹자는 카톡 문자를 보내왔다. 막걸리 반주 안주로 드릴 진달래 화전을 준비하려면 서둘러야 했다. 진달래 꽃잎을 따다가 아침 햇살에 빛나는 풀잎 이슬을 받고 또 받았다. 이슬방울을 오목하게 오므린 왼쪽 손바닥에 모았다가 혀끝으로 먹는 감촉은 어떤 차보다 감미로웠다.

-이슬은 하늘의 샘이야.

지난주였다. 꿈자리가 사납다고 새벽에 달려온 선생님이 햇살 쏟아지는 풀숲으로 이끌었다. 선생님은 내 왼손을 오므리게 하더니 조심스럽게 풀잎에 맺힌 이슬을 털었다. 모일 것 같지 않던 이슬방울이 금세 모여 손바닥을 간질였다.

-먹어 봐. 아주 달아.

그날 이후 아침마다 이슬을 받아먹었다. 풀잎과 나뭇잎 이슬을 매일 아침 먹거나 얼굴에 발랐다. 이런 나를 옆집 아가씨는 나비천사라고 놀렸다. 그녀는 유방암 수술을 포기했다. 가슴 없는 여자로 살면 뭐 해요. 임신해도 아기에게 젖 먹일 가슴이 없는데, 라면서도 미소를 잊지 않는 아가씨였다.

흙집 현관문을 여닫을 때마다 풍경이 맑게 울었다. 만사여의(萬事如意), 네 글자가 새겨진 풍경은 수술을 포기했던 내게 용기를 준 선생님의 선물이었다. 유방암 중에서도 난치병인 혈관육종(血管肉腫) 암으로 확진되었을 때 모든 것을 포기했다. 현대의학으로도 고칠 수 없는 암을 붙들고 살려달라고 몸부림치고 싶지 않았다. 그냥 운명으로 받아들인 후 선생님에게 친구의 이야기처럼 털어놓았다.

-그 친구 못 됐다. 남편과 딸을 사랑하지 않는구나.

3년 전, 선생님은 이야기의 주인공이 나라는 것을 눈치챘으면서도 내색하지 않았다. 엉뚱하게 배가 고프다며 밥을 먹자고 했다. 청와대 오른쪽 삼청공원으로 향하던 걸음을 돌려 주위를 살피며 물었다.

-지영아! 뭐 먹을까? 뭐 먹고 싶어?

선생님의 전 같지 않은 말투에 눈물이 왈칵 솟았지만, 애써 삼켰다. 눈물이 터지면 그 자리에 주저앉아 대성통곡할 것 같아 음식점을 찾는 척 돌아섰다. 유방암 확진을 받은 후 하루 한 끼도 챙기지 않았다. 정말 견딜 수 없을 만큼 배가 고프면 싱크대 앞에 서서 몇 수저 뜨다 말았다.

3월 하순이라지만, 아직은 바람이 찼다. 음식점을 나와 삼청공원의 양지바른 벤치에 앉았다. 구구 구구구 우는 산비둘기를 찾다가 눈을 감았다. 남편과 딸에게 몇 달째 감추면서 왜 선생님에게는 말했는지 그 이유를 생각했다. 의지하며 위로받고 싶은 사람이 가족이 아니라 선생님이었나? 얼마 남지 않은 생의 마지막을 선생님의 품에서 정리하고 싶었나?

선생님을 만난 것은 친구의 사진작품전에서였다. 생활한복의 선생님을 친구는 충무로의 멋진 남자로 소개했다. 여름을 열 번도 더 넘겨 입은 듯 생활한복 황토색이 바래다 못해 떡갈나무 낙엽 같았다.

-막걸리 생각나면 전화해요.

명함에는 이름 석 자와 휴대폰 번호밖에 없었지만, 늦여름에 만난 선생님은 작은 사무실을 가지고 있었다. 신문사를 퇴직한 친구들이 모여 글을 쓴다며 권한 것이 커피가 아닌 작은 밥사발의 막걸리였다.

-마셔 봐요. 온몸이 짜릿할 테니.

정말 그랬다. 시중에서 파는 막걸리가 아닌 조금 걸쭉한데도 부드럽게 목젖을 감싸는 맛이 일품이었다. 음미하듯 한 모금 더 마셨다. 뼛속까지 파고드는 감칠맛과 시원함에 진저리쳤다.

-어때요? 잘 왔죠?

빙그레 웃는 선생님은, 그 술은 취하도록 마시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말 그대로 곡차라며 친구 영감탱이들도 아껴 마신다고 했다.

선생님은 먼저 전화를 주지 않았다. 늘 내가 연락하여 식사하거나 술을 마셨다. 만나도 이야기는 나 혼자 다 했다. 선생님은 조용히 듣거나 빙그레 웃었다. 꼬치꼬치 물어야 몇 마디 하는 그 말 속에는 따뜻한 정과 배려가 있었다. 아마도 그 정과 배려 때문에 암에 걸린 사실을 말했나 보다. 이미 상당히 진행된 온몸의 가려움과 통증을 죽음의 사자로 받아들이면서 두려워지자 선생님에게 매달렸나 보다.

-진달래 꽃잎 안 먹어봤지?

나란히 앉아 있었다가 언제 일어나 따왔는지 진달래 꽃잎을 입에 넣어주는 선생님의 손길에 눈을 떴다.

-수술하자.

진달래 꽃잎을 입안으로 넣으며 선생님을 쳐다보았다. 선생님은 따뜻한 눈길로 바라보다가 감싸 안았다. 등을 토닥이다가 바람이 차다며 내려가자고 했다. 인사동까지 오는 동안 선생님의 팔짱을 꼈다. 전 같았으면 유부녀가 외간 남자 팔짱 끼는 거 아니라고 면박했을 터인데 말없이 허락했다.

-여기 이거 읽어 봐.

인사동의 한 골동품 가게에서 조그만 풍경을 건네주며 말했다. 풍경에는 만사여의(萬事如意)라는 한자가 새겨져 있었다. 그날 이후 그 풍경은 늘 내 곁에 있었다. 왼쪽 가슴 절제수술 받을 때에도 팔찌처럼 손목에 걸었다. 방사선과 항암 치료에도 꼭 들고 다니자 암 병실 환자들이 풍경아줌마로 불렀다. 그 풍경이 지금은 흙집 현관문에 걸려 들고날 때마다 맑은 소리를 낸다. 이곳 사람들, 대부분 암환자들이었다. 그들은 물론 보호자들도 나를 풍경여사로 불렀다.

선생님도 가끔 풍경여사라고 부르며 엉뚱한 농담으로 웃음보를 터트리게 했다. 선생님이 오십이 턱밑인 나를 열아홉 살 아가씨 같다는 등 놀리지 않으면 웃을 일이 없었다. 이웃 환자나 보호자들 때문에 웃긴 하지만, 그것은 예의로 짓는 표정에 불과했다.

텔레비전 위의 탁상시계가 열한 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선생님은 한 시간 안으로 도착할 것이다. 점심상 준비를 서둘렀다. 현미밥부터 안쳤다. 소금에 살짝 절여놓았던 배춧속을 찬물에 씻었다. 볕 바른 곳에서 딴 진달래 꽃잎도 살짝 헹궜다.

처음 붙이는 배춧속 진달래꽃 화전이었다. 처음에는 배춧속 부침만 붙이려다가 문득 삼 년 전 삼청공원에서 선생님이 입에 넣어주던 진달래꽃 생각이 났다.

-우리 언제 진달래꽃 화전 만들어 먹자.

서울 토박이인 나는 진달래꽃을 먹어본 적이 없었다. 선생님이 입에 넣어주며 달다고 했을 때 믿지 않았다. 그런데 정말 달콤하면서도 묘한 향기가 입안을 가득 채웠다.

첫 화전은 실패했다. 두 번째부터는 제법 모양을 갖춘 화전이 붙여졌지만, 현기증이 밀려오면서 속이 뒤집혔다. 기름 냄새 때문이었다. 화장실로 달려가 토악질했다. 암이 오른쪽 유방으로 전이돼 팥알 같은 혹이 뿌려지더니 허리와 아랫배까지 번지면서 견딜 수 없는 토악질과 극심한 통증이 시도 때도 없이 밀려왔다.

현관문부터 창문까지 문이란 문을 다 열어놓았다. 오늘의 이 점심상이 어쩌면 선생님에게 차려드리는 마지막 밥상일는지 모른다는 절망에 눈물이 났다. 선생님의 설득에 수술한 후 기적처럼 몇 년을 더 사는 동안 늘 따뜻한 손길로 감싸주어 뼈를 부수는 통증도 견딜 수 있었다.

-얼굴도 깨끗하고. 손과 팔도 멀쩡하고. 이제 곧 괜찮아지겠어.

선생님은 늘 희망을 심어주었다. 머지않아 막걸리 파티를 할 수 있겠다며 이마에 살짝 알밤을 주었다.

격심한 통증에 주저앉았다가 간신히 일어섰다. 프라이팬의 마지막 화전을 뒤집으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산 아래 국도에서 흙집 마을로 진입하는 선생님의 지프가 보였다. 산속의 흙집을 임대하자 승용차를 사륜구동으로 바꿨다. 선생님은 이틀이 멀다 하고 유기농 먹을거리와 생활용품을 가져왔다. 한 번은 그만 가져오라고 잔소리하자 허허 웃었다.

-풍경 아가씨! 그렇게 몰라요? 우린 지금 밀월을 즐기고 있어요.

밀월……!

선생님이 농담한 밀월이란 말을 되뇌는 순간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지프 멈추는 소리에 황급히 눈물을 닦으며 현관으로 가다가 온몸에서 터지는 극심한 통증에 쓰러졌다. 일어서려고 현관문에 매달리다가 풍경의 맑은소리 속으로 가라앉으며 밖을 내다보았다.

지프에서 내리는 선생님의 모습이 희뿌옇게 다가오다가 사라졌다.

정병국 작가|master@thegolf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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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정병국
도서출판 ‘지식과사람들’ 대표와 문예계간 ‘시와 수상문학’ 발행인. ‘문예창작아카데미’와 스마트폰 전자책문학 ‘파란풍경마을’을 운영하며 월간 현대양계에 콩트를 연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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