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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최호성, 골프는 인생의 전환점 ‘가난은 정신력과 승부근성을 키웠다’

기사승인 2017.12.31  16:4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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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위와 장인의 낯선 동행 ‘필드에서 빛과 그림자로 회자’...지금 이 순간도 최선을 다하는 일

[골프타임즈=문정호 기자] 최호성(44)은 지난 2013년 3월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의 에머랄다 골프장(파72)에서 열린 JGTO(일본프로골프투어)와 원아시아투어가 공동 주관한 인도네시아 챔피언십에서 우승하며 국제대회 첫 정상에 올랐다.

당시 악천후로 경기는 3시간가량 중단됐고 어렵게 재개된 경기에서 최호성은 18번홀 버디를 낚으며 7시간이 넘는 대장정 끝에 살아온 인생역정 만큼이나 짜릿한 승리를 쟁취했다.

국내 투어에서 2승을 달성한 최호성에게 유독 갤러리들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갈기머리로 필드를 누비며 바람에 흔들리는 머릿결은 인상적이었다.

지난날 기억을 회상하며 그를 만났을 때 옛 모습은 자취를 감추고 단정한 모습은 다소 낯설었으나 깔끔한 모습이 잘 어울렸다. 부리부리한 눈매에 거칠고 투박한 외모에서 사람들은 그에게 외골수, 잡초, 늦깎이, 독불장군 등의 수식어를 붙였다. 살아온 인생이 남달랐다.

경북 포항 장기가 고향인 최호성은 유년 시절을 바다와 살았다. 고향집이 바다가 눈앞에 보일 정도로 가까웠다. 가난한 집안은 농사와 바다 일을 겸했고 어머니는 지금도 해녀 일을 한다. 집안의 장남인 최호성은 배를 타면서 집안을 도왔고 거친 바다와 싸우면서 힘든 뱃일을 통해 강한 힘과 균형감각을 터득했다.

고등학교(포항 수산고) 시절 졸업 전에 현장실습을 나간 참치 하역 해체작업을 하다 오른손 엄지손가락 첫 마디를 잃는 사고를 당했다. 군대문제도 해결되지 않고 절망감에 빠져 2년 반 동안 정처 없이 전국을 떠돌며 숱한 직업을 전전하다 8번째 만에 골프를 접했다.

당시 암울한 미래에 대한 보장도 없는 상황에서 단지 살아가기 위한 몸부림으로 혈기 왕성한 20대에 온갖 힘든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간의 삶은 그야말로 잡초 같은 인생을 살았다. 훗날 골프를 하면서 힘든 나날을 버티게 해준 힘도 20대의 강한 정신력이었다고 말했다.

골프에 입문한 것은 그의 나이 26세 때다. 숙식제공 아르바이트를 구한다는 골프장 구직광고를 보고 허드렛일이라도 해보자는 심정으로 무작정 찾아간 곳이 경기도 안양베네스트였다. 당시 골프장 부사장(정영달)은 경영방침이 골프장 직원들도 골프를 알아야 한다는 취지로 전 직원이 골프를 접하게 됐다.

처음 골프채를 잡은 최호성은 주경야독(晝耕夜讀) 하며 프로골퍼의 꿈을 키워나갔다. 골프 기술도 모르고 코치도 없는 게다가 스윙에 장애가 되는 오른손 엄지손가락도 없는 치명적인 결함에도 굴하지 않고 골프채를 휘둘렀다.

처음 잡아본 골프채도 지금처럼 좋았던 것이 아니라 연습장 퍼시몬(감나무) 채를 휘두르며 독학으로 배운 스윙 폼은 투박하고 거칠치만 인생에 단 한번뿐이라는 심정으로 승부를 걸었다. 그때 다친 어깨가 교정치료를 통해 어느 정도 완치는 되었지만 지금도 고질병처럼 따라다닌다고 했다.

골프에 매진하며 홀로 최선을 다하다 보니 주변에 친구도 없고 그렇다고 그를 알아보는 골퍼 또한 없었다. 편견에 휩싸일 때도 혼자 고민하며 해결했다.

“이제까지의 삶이 무엇 하나 잘 하는 것이 없었는데...실패의 연속이었지만 골프만큼은 잘 해야겠다. 이것이야말로 인생의 전환점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죽을 만큼 열심히 했죠. 잡초처럼 살아온 내 인생에 승부근성이 살아있더라고요”

그랬다. 최호성은 골프에 몰입했다. 낮에는 근무하고 새벽과 늦은 밤 시간까지 골프연습에 몰두하며 부족한 부분은 골프잡지 등을 통해 자신만의 골프 이론을 정립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노력 2년 만에 세미프로에 합격(1999년 4월)하는 성과를 보였다. 프로가 된 이후에는 골프장 이목도 있고 하여 더 이상 근무하기가 힘들다고 판단, 그해 가을 골프장을 나와 홀로서기를 시작했다. 막상 나와 보니 맨땅에 헤딩하는 노숙자 신세가 되었고 골프연습장을 전전했지만 그 흔한 인맥도 없으니 알아주는 사람도 없었다.

“연습장 시절 알바로 기숙사 생활을 하다 자취도 하고 나중에는 마포에 있는 누님 댁에서 안양까지 출퇴근을 시작했죠. 정말 힘들었네요. 새벽이면 늘 단골로 찾아가는 용문시장 할머니 김밥 집에서 아침을 해결하고는 했었죠. 그러던 어느 날인가 할머니가 저를 조용히 붙잡고 하시는 말씀이 ‘총각 이른 새벽부터 장사 집에 동전 내미는 것 아니야’라는 말에 참 허망(虛妄)했죠”

좋은 인연의 말을 기대했는데 생뚱맞은 할머니의 야속한 말 한마디에 속 깊은 눈물을 흘렸다는 최호성은 세미프로 합격 2년 후 프로테스트(2001년)에 통과하며 당당하게 프로골퍼 반열에 올랐다. 프로가 된 그해 n016투어(2부 투어)에서 두 차례 우승을 경험하고 상금왕에 올랐다. 2004년 KPGA 코리안투어에 데뷔했다.

2008년 KPGA 하나투어 챔피언십 우승 이전까지 최호성은 혹독한 무명시절을 감내해야 했다. 투어프로 수입이 상금에 의존해야 하는데 성적이 좋지 않아 어려운 생활이 계속됐다. 이즈음 무명생활이 길어지면 선수들은 연습장 레슨을 하거나 선수생활을 포기하는 일이 많았다.

최호성 역시 독학으로 골프를 해온 터라 주변에 돌봐주는 사람도 없고 생활고가 막연했지만 참혹했던 지난날을 생각하며 철저한 자기관리에 열정을 쏟으며 5년여를 버텼다.

“제가 코리안투어 데뷔 이듬해인 2005년 말레이시아에서 지금의 아내(황진아)를 만나 결혼했는데 당시 힘든 상황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궁핍했죠, 가장으로서의 책임도 막중했지만 물질적으로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는 상황에서 아내의 내조가 큰 힘이 되었던 것 같아요”

힘든 시절을 이겨내고 선수들의 소망인 KPGA 투어 첫 승을 2008년 하나투어 챔피언십에서 김대현과 연장 접전 끝에 해냈다.

▲ 최호성과 캐디역할을 해주고 있는 장인(사진 위, 아래)

우승 당시 캐디를 맡은 장인과 찍은 한 장의 사진이 회자(膾炙)되며 부러움을 샀다. 골프장에서의 장인(황용훈)과 사위와의 인연은 지난 2007년 금강산 아난티골프장에서 열린 NH농협오픈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장인의 부친 고향이 이북(평북 정주?)인 것을 알고 “고향 땅에 한번 가보시지 않겠습니까?”라는 사위의 권유에 흔쾌히 허락한 골프마니아인 장인은 “역경을 딛고 독학만으로 프로가 되어 힘든 골프 인생을 걸어온 그에게 작은 도움이라도 되고 싶다”며 전담 캐디를 자처했다. 사위와 장인, 낯설고 어색한 관계의 동행은 필드에서 빛과 그림자처럼 함께했다.

적지 않은 나이에 선뜻 캐디를 해준 장인에게 최호성은 항시 고마움을 느꼈다며 이후 심리적으로도 안정되고 성적도 꾸준한 상승세를 기록했다.

2011년 KPGA 투어 레이크힐스 오픈(5월)에서 두 번째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2012년 KPGA 코리안투어 전 경기 출전 컷 통과하며 골프인생에 전성기를 맞았다. 2011~2012년 연속 한-일 골프대항전 밀리언야드컵에 한국 대표로 출전, 남들이 마다하는 선두에 나서며 승리에 견인차 역할을 하기도 했다.

2012년 12월 JPGA(일본프로골프) 퀄리파잉 토너먼트(QT)에 도전 31위로 시드를 획득하며 일본 무대 진출의 교두보를 마련했다. 2013년 골프 인생 최고의 정점을 찍는 해외투어 인도네시아 챔피언십에서 우승했다. 이미 일본투어에 진출한 최호성은 이 대회 우승으로 하반기와 이듬해 JGTO 시드권을 확보한 상태에서 오직 경기에만 전념할 수 있게 됐다.

선수들이 은퇴를 운운하며 골프채를 내려놓아야 할 시기에 누구와의 상의도 없이 최호성은 마흔 나이에 과감하게 일본으로 눈을 돌렸다. 현재 일본에서 활약하고 있는 한국 선수 중 최고참이다.

국내에서도 그렇듯이 일본에서도 마음을 열고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할 골프 친구가 없다. 오직 자신이 생각한 바를 추진하는 독불장군 스타일이다.

올해 일본투어 마이나비 ABC 챔피언십에서 준우승과 11일 PGA(미국프로골프) 웹닷컴투어(2부 투어) QT에서 2위로 통과한 임성재(19)가 최호성을 잘 따르며 임성재 아빠도 최 프로를 좋아한다고 했다.

“골프는 내게 직업이자 생활이죠. 먹고 사는 문제는 중요한 것이고 선수는 대회장에 있어야 하는데 국내 대회 수는 적고 가족을 굶주릴 수 없으니 일본투어에 눈을 돌릴 수밖에 별다른 도리가 없었어요. 남들은 모험이라고 하는데 제게는 살기위한 몸부림, 생존이었죠...”

나이는 숫자에 불과했다. 골프에서 장점이 샷이나 퍼팅을 잘한다는 것이 아닌 정신력(멘탈)이라고 말할 정도로 가난에서 터득한 정신력은 강한 생활력을 잉태했고 모험마저도 즐겁게 받아들이며 한국과 일본투어를 만족해하고 있다. 일본에서 최호성의 인기는 40~50대 아줌마들 사이에서 최고(짱)다. 내년이면 일본투어 6년 차다.

최호성은 올해 일본투어 시드권에 막차를 타며 가까스로 통과했다. 힘겹게 통과하는 순간 그동안의 골프인생이 스크린처럼 지나가며 북받쳐 오르는 슬픔과 감격에 두 번째 눈물을 흘렸다.

골프를 안했다면 무엇을 했을 것 갔냐는 질문에도 너무 절박한 인생이다 보니 그것마저도 생각해 볼 여유 없이 한길만 달려온 터라 지금 이 순간 최선을 다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훗날 살아온 지난날을 되돌아보니 강한 정신력으로 살아온 파란만장한 삶이 인생교훈이었다고 말한다. 늘 언제나 감사하는 마음으로 골프를 즐기고 있다고 했다.

지금 어떤 일을 하던 간에 처해 있는 현실상황에 최선을 다하자는 다짐을 갖게 되었다고 했다.

현재 최호성에게는 사랑하는 가족이 있고 아들 둘(초등 4학년, 5학년)이 씩씩하게 자라고 있다. 아이들이 골프를 좋아한다면 모를까 골프를 대물림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자신이 걸어온 골프의 힘든 점을 알기에 아이들은 건강하게 자랐으면 하고 스스로 삶의 방향을 정했으면 좋겠지만 둘 중 한 아이가 골프에 열정을 갖고 몰입한다면 도움을 줘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국내에서의 불미스런 일들이 올해로 끝나고 내년에는 코리안 투어에도 출전할 예정이다. 그간의 힘들었던 아픔을 털어내고 필드에서 최호성의 플레이를 볼 수 있을 전망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캐디역할의 장인 모습은 필드에서 보기는 힘들 것 같다. 장인어른의 연세도 있고 하여 더 이상은 필드 동행은 힘들 것 같다고 했다.

인터뷰 말미에 일본에서 히로타골프 대표님이 여러모로 세심하게 많은 도움을 주고 있어 고맙고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고 귀띔하며 최호성은 “국내에서든, 일본에서든 응원해 주시는 팬들을 위해 부끄럽지 않은 모습을 보여드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 그간 격려해 주는 팬들이 많아진 만큼 감사한 마음을 갖고 사랑받는 선수가 되고 싶다. 우승도 소중하고 부상 없이 오랜 시절을 현역에서 활동하는 선수로 남고 싶다”는 바람을 전했다.

사진=KPGA 민수용 기자
문정호 기자|karam@thegolf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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