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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국 4千字 소설 제13회] 재미있는 여자

기사승인 2018.02.15  00:3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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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같이 사는 거 그만 접자

[골프타임즈=정병국 작가] 동거할 생각은 꿈에도 없었다.

만나면 영화를 보거나 술을 마셨다. 주말에는 바닷가를 찾거나 가끔 산에도 다녔다. 그러다가 몇 달씩 전화 한 통화 없이 까맣게 잊고 지냈으니까 우리는 분명 연인이 아니었다. 그런 우리가 어느 날부터인가, 한집에 살고 있었다. 그게 불과 몇 달 전이었다.

그는 알바인생이었다. 아침에 출근했다가 해 질 무렵에 퇴근하는 번듯한 직장이 없었다. 그러나 생활비는 꼬박꼬박 내놓았다. 지난달에는 두 달 치 몫을 한꺼번에 내놓으며 멋졌게 웃었다.

“다음 달 거까지야.”

“무슨 뜻이야?”

“있을 때 내놓으려고.”

“없으면?”

그날 받은 돈 봉투를 흔들며 ‘이거 못 주면 집 나가겠다. 그거야?’라고 물으려다가 방으로 들어갔다. 돈 봉투를 흔들며 얼굴을 쳐다볼 때 갑자기 가슴이 아려왔다. 전에 없던 감정이었다. 그가 쓰리 잡을 뛰면서 비정규직이라도 취업하려 발버둥질치는 모습에 그냥 적당히 살라고 핀잔했었다. 그까짓 월급쟁이 이가 뭐 대단하다고 목매느냐며 빈정거렸었다. 그런데 있을 때 내놓는다는 말이 예리한 아픔으로 파고들며 말문을 막았다.

그날 이후 우리 두 사람 사이에 묘한 기류가 흘렀지만, 누구도 내색하지 않았다. 그는 말을 아꼈고, 나는 그가 집에 있는 짧은 시간만이라도 편히 쉴 수 있게 작업실에서 나가지 않았다. 1005호 작은 아파트는 방이 세 개였다. 큰방은 두 사람의 침실로, 그리고 방 하나씩을 각자의 공간으로 쓰며 생활했다. 그의 방은 썰렁했다. 작은 책장과 책상에 컴퓨터 한 대가 창가 쪽으로 놓여 있고, 낡은 비키니 옷장은 늘 지퍼가 반쯤 열려 있었다.

동화 삽화로 생활비를 버는 내가 그의 방보다 조금 큰 방을 썼다. 베란다로 통하는 문을 아예 투명한 통유리 문으로 바꿔 밖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삽화를 그리다가 내다보는 하늘은 늘 피로를 풀어주었다. 낮에는 푸른 호수에 무수히 떠 있는 구름이, 밤에는 별 무리가 쏟아지며 가슴을 따뜻하게 했다.

“먹고 해.”

동트기 전 커피와 토스트를 작업실로 가져온 그가 그림이 예쁘다고 했다. 그리고는 지나가는 말처럼 당분간 자정이 넘어야 들어올 거라며 방을 나갔다. 그 말은 알바를 하나 더 뛰던지, 아니면 마지막 일의 종료 시각이 연장됐던지 둘 중의 하나였다.

현관문이 닫히면서 찌르릉 땡 전자자물쇠 잠기는 소리에 자리에서 일어섰다. 커피를 들고 베란다로 나가 10층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다. 잠시 후 뛰어가는 그의 모습이 들어왔다가 사라진 쪽을 바라보다 돌아섰다. 베란다를 등진 채 당분간 자정이 넘어야 들어올 거라던 그의 말을 되뇌는 순간 울컥 슬픔이 밀려왔다.

“그 순간 내 기분이 어쩌는지 알아?”

밤을 꼬박 새워 작업했으면서도 잠이 오지 않았다. 그가 동트기 전에 나가 자정이 넘어서 귀가하는 게 나와 무슨 문제라고 가슴이 아려오는지 그 이유가 설명되지 않았다. 그와는 우연한 동거일 뿐이었다. 평생을 함께할 남자가 아니었다. 그는 그만 내 집에서 나가라면 나갈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왜 눈물까지 찔끔거려?

오전에 눈 좀 붙였다가 오후에 출판사에 가려던 일정을 포기하고 세라를 찾아갔다. 도대체 이게 무슨 감정이냐며 절망하자 그녀가 한심한 표정으로 쏘아붙였다.

“너, 미쳤구나.”

“내가?”

“그럼 내가 미쳤니?”세라의 미쳤다는 말이 실감 났다. 정말 미치지 않고서는 그런 감정 속으로 곤두박질칠 수 없었다. 동거한다고 해서 그가 내 남편이고, 내가 그의 아내가 된 것이 아니었다. 우리는 그냥 편하게 함께 생활할 뿐이었다.

“계속 부부로 살 거니?”

“미쳤어? 부부 연을 맺게.”

“이미 맺어놓고 무슨 소리야? 꼭 결혼식에 혼인신고를 해야만 부부니? 한집에, 한 침대에서 살면 그게 부부지. 동거? 그거 사실혼이잖아. 이것아!”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현실이었다. 그가 내 아파트, 내 침대에서 잔다고 우리 관계를 부부로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냥 평소처럼 부담 없는 친구였다. 섹스도 그랬다. 서로가 원하면 즐겼다. 그가 내 아파트로 오기 전부터 우린 자연스럽게 즐겼고, 그것에 어떤 부담감도 갖지 않았다. 섹스는 섹스일 뿐이었다.

그러나 부부로 살 거냐고 물었을 때 더럭 겁이 났다. 부부라는 말이 엄청난 무게로 온몸을 짓눌렀다. 몇 달 동안 함께 살면서 나도 모르는 사이 그가 남편으로 자리매김한 것이 아닌가 싶어 눈을 감았다. 오늘, 동트기 전에 알바 일터로 달려가는 모습이 가슴 짠하게 파고든 것도 어쩌면 아내가 남편을 바라보는 시선이 아니었을까.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고개를 가로저었다. 결코, 인정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앞으로 어떻게 할 거야?”

세라의 재촉에 눈을 떴다.

“어떻게 하긴……내보내야지.”

“언제?”

세라가 따지듯 언성을 높였다가 길게 한숨지었다. 내가 왜 미주알 콩알 따지면서 몰아붙이는지 모르겠다며 커피를 더 가져왔다. 그녀가 창밖을 내다보며 커피를 마시는 동안 그가 어떻게 해서 아파트로 들어왔는지 더듬어보았지만, 분명하게 잡히는 게 없었다. 술김에 당분간 함께 살자고 낚아채 왔다면 깔깔거리기라도 하겠는데 그런 객기도 없었다. 하여튼 그가 어느 날부터인가 방 하나를 차지했고, 잠은 내 침대에서 잤다. 어쩌다가 저녁을 함께 먹기라도 하면 부실한 반찬이 신경 쓰였으나 침대에 나란히 누워 텔레비전을 보다가 잠드는 것은 오히려 편안하고 좋았다. 그때는 그런 기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으나 지금은 아니었다.

“세라야! 나 있지. 지금 생각해보니까…….”

사소하지만, 기분 좋은 시간도 많았던 거 같다고 말하려 할 때 그녀가 짜증난 눈길로 쏘아붙였다.

“왜? 갑자기 내보내기 싫어졌니?”

“아니. 지금 생각해보니까 괜찮았던 같아. 그와 함께한 시간이.”

“행복했다 이거니?”

세라의 말에 고개를 가로저었다가 바로 끄떡였다. 고개를 가로저은 것은 행복이란 단어를 떠올린 적이 없어서였다. 몇 달 동안 함께한 시간도 불편하지 않았다. 그래서 고개를 끄떡였다. 있는 듯 없는, 없는 듯 있는 그림자 같은 남자였다.

“그냥 그렇다는 거야. 너무 닦달하지 마.”

“닦달하는 게 아니라…….”

이번에는 내가 세라의 말을 잘랐다. 그녀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두루 뭉실한 내 말에 화가 나 있었다. 남자와 살 거라면 네가 선택하고 결정해야지, 어떻게 슬그머니 굴러들어온 돌에게 모든 걸 안겨주니? 더구나 사랑하지도 않는, 앞날이 깜깜한 남자에게.

“세라, 네가 무슨 말 하려는지 알아. 그런데 나, 변명 좀 하자.”

우린 누구도 동거하자고 요구하지 않았어. 생활비를 반씩 부담한다는 등 동거 십계명 같은 항목을 만들지도 않았고. 문제는 동거 시작이 불가사의하듯 함께 살면서 하나도 불편하지 않았다는 거야. 어느 날부터 나만의 공간에 그가 들어와 앉았는데도 말이야.

“이런 나, 재미있는 여자 아니니?”

“뭐라고? 재미있는 여자?”

세라는 얼굴을 뚫어지도록 노려보다가 일어섰다. 너 때문에 정말 돌아버릴 것 같다며 커피숍을 나갔다. 세라는 뒤도 안 돌아보고 사람들 속으로 사라졌다. 그녀의 반쯤 남은 커피를 내 머그잔에 따르려다가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커피의 따뜻한 온기가 손바닥을 타고 온몸으로 스며들었다. 문득 그가 지금은 어디에서 알바 하는지 궁금해졌다. 일하는 그의 모습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보고 싶어 휴대전화기를 가방에서 꺼냈다.

그는 삼십 분이면 갈 수 있는 편의점에서 일하고 있었다. 통화를 끝내며 일어서다가 다시 앉았다. 그의 알바 편의점으로 가는 것을 포기하고 천천히 문자를 찍었다. 우리가 부부니? 결혼하지 않고 사는. 너도 그렇게 생각하니? 라고 썼다가 지웠다. 부부, 결혼이라는 단어에 거부감이 밀려와 주르르 지웠다. 커피를 조금 마신 후 이번에는 빠르게 문자를 찍어 곧바로 전송했다.

우리 같이 사는 거 그만 접자.

정병국 작가|master@thegolf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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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정병국
도서출판 ‘지식과사람들’ 대표와 문예계간 ‘시와 수상문학’ 발행인. ‘문예창작아카데미’와 스마트폰 전자책문학 ‘파란풍경마을’을 운영하며 월간 현대양계에 콩트를 연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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