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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국 4千字소설 제20회] 첫 번째 주말

기사승인 2018.04.19  08:0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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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픔을 그리는 그림마다 숨겨 놓아

[골프타임즈=정병국 작가] 안개비가 간간이 창문으로 날아들었다.

그때마다 풍경이 산기슭의 적막을 깼다. 며칠 전 읍내에 나갔다가 길거리에서 산 앙증맞은 풍경 두 개를 처마에 매달면서도 기대하지 않았는데 소리가 청명했다. 산비둘기의 울음소리도 들리지 않는 오후, 산줄기를 타고 내려온 솔바람과 어우러진 풍경 소리는 소름이 돋을 만큼 맑았다.

식은 커피를 버리고 다시 내렸다. 나흘 전 오후, 그가 불쑥 찾아왔다가 돌아간 뒤 붓을 들 수가 없었다. 작은 도시의 각각 다른 신문사 문화부 기자인 우리는 문화행사에서 자주 마주쳤다. 나이도, 신문사의 입사 연차도 같아 자연스럽게 말을 놓았다. 그게 인연의 다였다. 그런데 주말이 기다려지며 손끝이 풀리다니 황당했다.

십 년 만의 만남이었다. 마당으로 들어서는 그를 너와집 복도 한가운데에서 지켜보았다. 그가 가까이 걸어오자 마당으로 내려섰다. 우리는 반가운 말이나 악수도 하지 않았다. 마치 어제도, 그제도 만났던 사람처럼 눈인사만 나눴다. 옛날처럼 그가 먼저 말을 건넸다.

“바빠?”

“아니. 늘 그렇지 뭐.”

“그래? 차 한 잔 할까?”

“그럴까?”

그러나 여기는 도시의 번화한 거리가 아니었다. 산촌에서도 외진 곳에 버려진 듯 자리 잡은 너와집 두 채가 전부였다. 너와집과 너와집을 잇는 지붕이 있는 복도에서 조금 떨어진 마당 한쪽에 제법 널찍한 바위가 있었다.

“저기 앉아.”

그를 그림 작업실로 들여보내려다가 바위를 가리켰다. 그에게 습작 수준의 그림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중학교 때 화가가 꿈이었다. 각종 대회에서 상도 여러 차례 받았다. 그러나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꿈이 기자로 바뀌었다. 마침내 신문사 기자가 됐지만, 교통사고의 화재로 온 몸에 화상을 입었다. 다행히 얼굴과 두 팔꿈치 아래는 멀쩡해 늘 바지에 긴 소매 옷으로 상흔을 감췄다.

지난가을 산에서 채취한 들국화 꽃잎차를 준비하려다가 커피를 내렸다. 커피는 맛보다 향이 더 좋아. 마음이 편안해져. 아마 평생 커피 외에는 어떤 차도 안 마실 거라던 그의 말이 떠올라 피식 웃었다. 그 당시에도 관심 없었던 말이 지금까지 머릿속 어딘가에 숨어 있다가 생뚱맞게 툭 튀어나오자 절로 콧방귀가 터졌다.

커피를 들고 나왔을 때 그는 바위에 없었다. 주위 풍경을 구경하나 싶어 소리쳐 부르니 너와집 작업실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림 좋은데. 커피 여기서 마시자.”

그는 그림들이 걸린 벽 앞에 서 있었다. 커피잔을 받아들며 물었다.

“여류화가라…….”

“커피나 마셔.”

“전시회 열자. 내가 주선할게.”

“미쳤어?”

그는 미쳤느냐는 되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10호 크기의 야생화 그림을 가리키며 무슨 꽃이냐고 물었지만,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꽃들이 만개했는데 왠지 슬픔이 묻어난다. 뭐랄까? 행복 속의 고독 같은데 그 이유가 무엇인지 모르겠다며 쳐다보았다.

활짝 핀 꽃송이마다 상처가 있었다. 꽃잎 하나가 살짝 찢어지거나 시든 모양을 드러나지 않게 처리했다. 그런데 그가 그것을 포착하자 내심 놀라면서도 내색하지 않았다. 살짝 찢어졌거나 시든 꽃 이파리는 나의 모습이었다. 차에 불이 붙은 큰 사고에서 기적처럼 얼굴과 두 손은 작은 상처 하나 입지 않았다. 그러나 옷 속의 몸은 몇 차례 성형수술을 받았으나 사고 전의 여자로 돌아갈 수 없었다. 그 아픔을 그림마다 숨겨놓았다.

“검은색이 많아서 그럴 거야.”

“그런가?”

그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휴대폰을 꺼내며 쳐다보자 고개를 저었다.

“아직 미완성이야.”

거짓말이었다. 그는 그림 오른쪽 아래 구석의 영문 이니셜을 보았으면서도 순순히 돌아섰다. 작업실을 나가다가 아쉬운 듯 돌아서려는 그를 밀어냈다. 산촌으로 들어온 이듬해 봄부터 붓을 들었으니까 올해로 6년째였다. 할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었고, 살아 있으려면 그림이라도 그려야 했다. 그렇게 시작한 그림은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다. 이따금 찾아오는 산촌 사람들에게도 작업실은 출입금지였다.

“지금 내 기분이 어떤지 알아?”

“욕해. 개떡 같다고.”

“네가 화가라……빌어먹을! 이건 완전히 사기다.”

후후 웃음이 터졌다. 너 때문에 모처럼 웃는다고 했지만, 그는 못 들은 척 복도를 지나 거실로 들어갔다. 거실이 있는 너와집은 방이 두 칸이었다. 주방 옆에 욕실 겸 화장실이 있는 살림집은 겉모습만 너와집이지 내부구조는 아파트나 다름없었다. 작업실은 심마니 부부가 약초를 보관하던 헛간을 고친 공간이었다.

이 방, 저 방, 욕실 문까지 열어본 그가 주방 냉장고에서 김치와 달걀을 꺼냈다. 용케 국수도 찾아내더니 조금은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

“조 기자, 너도 국수 좋아했지?”

아니라고 하려다가 새콤달콤한 비빔국수가 먹고 싶었는데 잘 됐다고 했다. 그는 이따금 점심으로 국수가 어떠냐고 전화했다. 그때마다 그는 멸치국수였고 나는 비빔국수였다. 그는 입맛은 변하지 않았구나, 라며 돌아보더니 갑자기 서운한 표정으로 물었다.

“꼭 그래야 했어? 나한테까지.”

행적을 감춘 지 십 년이나 지난 지금에서 탓하는 그의 옆으로 다가갔다.

“너, 나를 좋아했구나?”

“너의 어머니도 그렇지. 감출 거면 끝까지 감추지. 넌지시 귀띔하는 건 또 뭐냐?”

그는 어느 결혼식장에서 우연히 만난 어머니에게 인사하자 묻지도 않았는데 내가 숨어 있는 곳을 알려주었다고 했다. 그러나 괘씸한 마음에 차일피일 미루다가 한번은 봐야겠다 싶어 찾아왔다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날 사랑하는 거 맞네. 그런데 어떻게 하냐?”

교통사고 전이라면 결혼은 아니더라도 뜨겁고 진한 연애는 했을 텐데 정말 아쉽다고 덧붙였지만, 그는 들은 척도 안 했다. 익숙하게 비빔국수를 준비해 마당 바위에 내놓더니 싸리나무 가지로 젓가락을 만들어 건네주었다.

“이 남자, 인제 보니 여자 꼬드길 줄 알잖아? 이거 감동이다.”

산으로 들어와 처음으로 사용하는 즉석 나뭇가지 젓가락이었다. 한 번도 상상조차 못 했던 뚝뚝 꺾은 생나무 젓가락의 냄새를 맡았다. 꺾인 부분의 속살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다. 풀꽃 향기 같기도 하고 비릿한 젖내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우리는 말 없이 싸리나무 젓가락으로 국수 그릇을 비웠다. 옛날에도 그랬다. 음식을 먹는 동안에는 누구도 말하지 않았다. 조용히 음식만 먹는 그 모습은 영락없이 신경전 중인 남자와 여자였다.

“우린 왜 이 모양이나?”

그가 쳐다보며 피식 웃었다. 민망한 웃음이 아니라 새삼스럽게 웬 트집이냐는 핀잔이었다. 그가 그릇을 들고 일어서자 다리를 잡아 앉혔다.

“여긴 왜 왔어?”

그가 마당으로 들어서는 순간부터 묻고 싶었다. 그가 그림을 볼 때도, 국수를 준비하는 동안에도 계속 입안에서 맴돌던 말이었다. 그러나 따지듯 내뱉을 수가 없었다. 산촌의 외진 곳까지 찾아온 사람에게 예의가 아니라서 묻지 않은 게 아니었다. 무엇 때문이라고 꼬집어 말할 수 없지만, 자꾸만 망설여졌다.

“여기 하늘은 색깔부터 다르구나. 구름도 더 하얗고.”

그는 두 손으로 쌍안경을 만들었다가 풀며 바위에 누웠다. 슬그머니 무릎 베려는 몸짓을 밀어냈다.

“엉뚱한 짓 말고 묻는 말이나 대답해. 왜 왔냐고?”

“시간 날 때마다 와야겠다. 나 먹을 거 가져올 테니 걱정하지 마.”

그는 눈을 감더니 이내 잠이 들었다. 어이가 없어 노려보다가 국수 그릇과 싸리나무 젓가락을 챙겨 집 안으로 들어갔다. 설거지를 끝내고 소파에 앉아 있다가 밖으로 나갔다. 바위에 그는 없고 돌멩이로 눌러놓은 쪽지만 있었다.

-주말마다 보자.

오늘이 그 첫 번째 주말, 토요일이었다. 그를 기다릴 이유가 없다면서 눈은 자꾸만 창밖으로 향했다. 산 아래의 마을로 들어오는 길은 안개비에 묻혀 보이지 않았다.

정병국 작가|master@thegolf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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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정병국
도서출판 ‘지식과사람들’ 대표와 문예계간 ‘시와 수상문학’ 발행인. ‘문예창작아카데미’와 스마트폰 전자책문학 ‘파란풍경마을’을 운영하며 월간 현대양계에 콩트를 연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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