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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국 4千字 소설 제28화] 기억 속 저편

기사승인 2018.06.22  09:0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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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할머니의 시 낭송에서 어머니가 보였다

[골프타임즈=정병국 작가] 등산객들의 웃음소리가 소나무만큼이나 짙푸르고 싱싱했다.

팔월의 관악산 등산로 입구, 향교의 계단에 앉아 끊임없이 이어지는 남녀노소의 등산객들을 바라보다 물가로 내려갔다. 간밤에 장대비가 한바탕 쏟아진 뒤라 계곡의 물살이 무릎을 휘감았다. 하얀 물거품을 일으키며 떨어지는 폭포 아래에서 물놀이하는 어린이들의 틈에 슬그머니 끼어들어 함께 텀벙거렸다. 한여름의 무더위가 일순간에 사라지며 유년 시절이 떠올랐다.

6․25전쟁의 포성이 멈추자 우리 가족은 산골 마을에서 소작농으로 연명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농사일로 아침에 나갔다가 해가 질 무렵에 초가삼간으로 돌아왔다. 외딴집이라 온종일 혼자 놀아야 했다. 심심하면 마당 앞으로 흐르는 도랑에서 가재를 잡았다. 풀숲을 돌아다니며 방아깨비를 찾았다. 키가 닿지 않는 소나무 가지에 앉아 신나게 우는 매미를 쳐다보다 돌멩이를 집어 던졌다. 그러다가 지치면 방에서, 쪽마루에서 낮잠을 잤다.

같이 놀 친구가 없는 산골이 싫었다. 가재도, 방아깨비도, 하늘에 둥둥 떠 있는 구름도 모두 재미없었다. 어쩌다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지는 비행기를 본 날 밤에는 하늘을 날아다니는 꿈을 꾸곤 했다. 그렇게 여름이 끝나갈 무렵 아버지는 나를 지게에 태워 냇가로 데려갔다.

아버지가 소에게 먹일 꼴을 한 짐 베는 동안 나는 물레방아 놀이를 했다. 아버지가 처음 만들어준 풀줄기 물레방아는 물살에 채여 뱅글뱅글 정말 잘 돌아갔다. 아랫마을의 커다란 물레방아보다 삐걱거리는 소리도 없이 잘 돌아갔다.

“재미있니?”

꼴을 다 벤 아버지가 땀방울이 툭툭 떨어지는 얼굴로 다가왔다.

“다음엔 더 크게 만들어주마.”

아버지는 나를 목욕시키기 시작했다. 아버지 손에 처음 목욕을 하자 상당히 긴장했다. 여름이든 겨울이든 목욕은 언제나 어머니 몫이었다. 아버지는 나의 목욕하는 모습을 지켜본 적도 없었다. 그런 아버지가 커다란 손으로, 자갈밭 같은 손바닥으로 온몸을 씻어주는 아버지의 얼굴은 웃음으로 가득했다.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냇물 목욕과 활짝 웃던 당시의 아버지 얼굴을 떠오르자 가슴이 아려왔다. 아버지는 자식들을 다정다감하게 대하지 않았다. 칭찬보다 불호령이 많았다. 초등학교에 들어가자 농사를 배우게 했다. 공부도 좋지만, 농사일을 익히는 것도 중요하다며 학교에 가지 않는 반공일이나 일요일에는 호미와 낫을 쥐여주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에는 웬만한 농사일은 척척 해내는 작은 농군이 되어 있었다. 지금도 웬만한 농사는 거뜬히 해낼 것 같았다.

물놀이에 정신없는 아이들 속에서 빠져나와 계곡의 위쪽으로 올라갔다. 더위를 피해 나온 사람들이 곳곳에 자리 잡고 산바람과 물을 즐기고 있었다. 준비해온 먹을거리도 풍성했다. 음식을 지천으로 펼쳐놓고 먹는 그들의 즐거운 모습을 바라보다가 물가에서 조금 떨어진 바위에 걸터앉았다. 모자를 벗고 심호흡으로 가슴을 마음껏 펴다 또다시 까맣게 잊었던 추억에 눈을 감았다.

보릿고개 때의 천렵은 산골 마을의 잔치였다. 이 골짜기, 저 골짜기 흩어져 다랑이 논밭으로 사는 산골 사람들이었지만, 천렵 날에는 모두가 한 가족이었다. 냇가의 그늘진 나무 밑에 걸린 솥에서는 닭고기가, 개고기가 펄펄 끓었다. 냇물에서 잡은 물고기 매운탕도 그릇마다 넘쳤다.

지난해 지은 먹을거리가 다 떨어진 무렵인 하지 햇감자가 나오기 직전, 보리타작이 있기 전의 유월에 벌이는 천렵은 어린이들의 배가 터지는 잔칫날이었다. 돼지고기 한 점 먹을 기회가 없었던 어린이들은 닭고기와 개고기, 민물고기로 올챙이배가 됐다. 마을 노인들도 게트림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자식 부부와 손자 손녀 배를 걱정하느라 밥그릇을 다 비우지 못하고 내려놓았던 수저를 천렵 날에는 고깃국을 더 청할 수 있었다. 막걸리도 넉넉히 마신 노인들의 흥겨운 노랫가락이 시원한 산바람을 탔다.

마을 청년들은 그동안 주렸던 배를 채우기보다 한쪽에 몰려 화투놀이에 정신없었다. 어른들이 눈감아 주는 모처럼의 즐거운 시간이었다. 산골 마을일수록 노름이 성했다. 결국, 노름빚 때문에 야반도주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천렵이 있는 날에는 청년들에게 술내기 정도의 화투는 용납이 됐다.

천렵은 음식을 준비하는 여인네들도 마음 놓고 웃을 수 있는 날이었다. 천렵에는 공동으로 준비한 음식과 마을의 넉넉한 집에서 내놓은 먹을거리로 함지박이 차고 넘쳤다. 땟거리 걱정을 하던 여인네들은 넘치는 먹을거리에 절로 힘이 났고 웃음보가 터졌다.

어머니도 마찬가지였다. 유난히 몸매가 호리호리한 어머니는 이 음식, 저 음식 만들고 나르는 몸짓에 흥이 넘쳤다. 마치 당신의 집 곳간에 있는 음식으로 동네잔치를 하시는 양 손길이 바빴다. 어린 나는 그런 어머니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배를 채웠다. 다른 또래들도 마찬가지였다. 어울려 놀기보다 각자의 어머니 치마폭에서 벗어나지 않고 주는 대로 받아먹었다.

“뭐 더 줄까?”

“아이고! 이 녀석 배 좀 봐. 맹꽁이 배네.”

“그만 먹자. 체하겠다.”

“내버려 둬요. 애들이 언제 또 고기 맛을 봐요.”

지금도 그때의 어머니 목소리는 물론 이웃집 아주머니들의 놀림 소리가 귀에 쟁쟁했다. 당시의 내 모습보다 어머니의 목소리가 더 생생한 것은 아마도 풍성했던 음식 때문일 것이다. 읍내의 중학교에 합격해 이사하기 전까지 해마다 천렵 날을 몹시 기다렸다. 군에서 첫 휴가를 나왔을 때 마을을 찾아갔었다. 다랑논과 밭도, 꼴을 베던 산기슭의 숲도 옛 그대로였다. 해마다 초여름이면 벌어졌던 천렵 자리를 돌아보며 입맛을 다셨던 기억에 빙그레 웃음이 나왔다.

“야! 이놈들! 밥 먹자.”

“그만 놀아. 과일 먹자.”

물놀이에 빠진 아이들은 들은 척도 안 했다. 부모가 다가가자 건너편으로 내빼는 아이들의 해맑은 모습이 몰려다니는 다람쥐 같았다.

물가를 벗어나 하산하는 등산객들의 틈에 끼여 천천히 내려와 쉼터의 나무의자에 앉았다. 통나무집 작은 꽃밭의 맞은편 삭도건물 철조망 울타리에 걸려 있는 여러 편의 걸개시화를 읽었다. 목공예가이자 시인인 지인의 작품으로 등산객들의 발길을 잡았다. 땀이 흐르는 얼굴로 시를 읽는 등산객들의 모습이 어느 화랑에서의 시화전보다 더 아름다웠다.

걸개시화를 카메라에 담는 할머니를 지켜보았다. 일행인 다른 할머니가 시를 낭독하자 지나던 등산객들이 발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한 편, 한 편 낭독이 끝날 때마다 환호와 함께 박수를 쳤다. 할머니의 시 낭독으로 한여름의 뜨거운 열기가 사라졌다. 모두의 얼굴에 밝은 웃음이 시원한 산바람으로 흘렀다.

“할머니! 할머니의 자작시를 낭송해주세요.”

누군가 자작시 낭송을 요청했다.

“맞아요. 할머니의 시를 들려주세요. 자! 우리 큰 박수로 청합시다.”

누군가가 큰 목소리로 박수를 유도했다.

칠십이 훌쩍 넘었을 할머니는 시인이 아니라서 자작시가 없다며 김소월의 진달래를 낭송했다. 시를 낭송하는 할머니의 표정이 참으로 행복했다. 시의 흐름을 조절하며 알맞은 목소리로 시 낭송을 마친 할머니가 고개를 숙이자 박수가 터졌다.

할머니의 시 낭송에서 고희 잔치 이듬해 이승을 떠난 어머니의 모습이 보였다. 어머니도 키와 체구가 작았다. 목소리도 깨끗했다. 노년으로 접어들면서 급격히 쇠약해진 어머니는 김소월 시집을 머리맡에 놓고 틈틈이 읊조렸다. 낭송도 낭독도 아닌 흥얼흥얼하며 묘한 리듬을 탔다. 김소월 시가 그렇게 좋으냐고 물었을 때 어머니는 넌 어떠냐고 되물었다.

“좋아해요.”

“큰아들이 좋아한다면 나도 좋구나.”

큰아들이 좋아하는 것은 당신도 다 좋다던 어머니는 병원에 입원한 지 보름 만에 저세상으로 떠났다. 그때 김소월의 시집도 어머니의 유품과 함께 불에 태웠다. 걸개시화가 걸려 있는 관악산 기슭을 벗어나며 김소월의 산유화를 어머니처럼 읊조렸다.

산에는 꽃 피네 꽃이 피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피네

정병국 작가|master@thegolf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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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정병국
도서출판 ‘지식과사람들’ 대표와 문예계간 ‘시와 수상문학’ 발행인. ‘문예창작아카데미’와 스마트폰 전자책문학 ‘파란풍경마을’을 운영하며 월간 현대양계에 콩트를 연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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