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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옥임의 시詩산책 43회] 전봇대의 혀

기사승인 2019.11.27  08: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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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봇대의 혀

이 가을에 실종된 사람들
전봇대에 숨어있다
부착방지용 뾰족이 틈새로
낡은 가발처럼 달라붙어 있다
모든 걸 용서할 테니 집으로 돌아오라는 호소는
속치마처럼 펄럭이고
유괴된 아이를 찾는다는 울먹임은
쇠창살처럼 먹먹하다
돈 밀려준다는 신용대출 전단지는
혀 빼물고 사람 유혹하고
스포츠센터 다이어트 광고는
여자들 계모임처럼 아양 떨며 왁자지껄하다
자살클럽 안내는 가면무도회처럼 은근하고
당신은 행복합니까 하고 묻는 수련원 포스터는
도둑맞은 답안지처럼 허탈하다
예쁜 아가씨 넘친다는 대양나이트클럽 광고는
한 귀퉁이가 찢어져 대야 나이트로 땅에 떨어져 밟힌다
전봇대는 혀가 길다
나를 분실했으니 찾아주면 후사함이란 스토리까지 달고
숨이 차 펄럭이지만
북새통들을 낙엽처럼 떨구지 않고
땅에 떨어진 전단지까지
묵묵히 몸에 휘감은 채
희망의 신문고를 울린다
    -저자 마선숙 시 [전봇대의 혀] 전문(모던포엠)-

마선숙 시인은 소설가이자 수필가이다. 수필도 맛깔스럽게 잘 쓰지만 소설도 걸출하다. 그래서인지 시도 다소 호흡이 긴 편이다. 매일 페이스 북에 글을 한 편 또는 두 편씩 올린다. 그 열정에 놀란다.

마 시인과 단체 여행을 함께 간적이 있는데 새벽 3시경에 화장실에 들어가선 1시간이 지나도 안 나왔다. 온갖 불길한 생각을 하며 문을 열었는데 쭈그리고 앉아 스마트 폰에 글을 쓰고 있었다.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라고 했다. 누가 재촉하거나 검열하는 게 아닌데도 스스로 속박 속에 자신을 쭈그려 앉혔다.

위의 시를 읽고 있으면 우리의 삶이 다 드러나 있다. 다급하니까 전봇대에라도 외쳐달라는 도와달라는 찾아달라는 절박한 아우성이 있다. 이건 전봇대 정리사? 에 의해 하루도 못 버티고 떼어질 휴지 쪽들이다. 그것을 시인은 희망의 신문고라고 추켜세우고 있다.

정옥임 시인|master@thegolftimes.co.kr
< 저작권자 © 골프타임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정옥임 시인
1996년 ‘문학21’로 등단, 황진이문학상 등 다수의 문학상을 수상했다. 현대시 영문번역에 남다른 열정을 쏟아온 시인은 ‘시 읽는 사회를 위하여 나는 시를 읽고 시를 쓴다’ 등 시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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