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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옥임의 시詩산책 50회] 배추밭에서

기사승인 2020.01.15  09:5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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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추밭에서

아내와 함께 배추밭에서
배추모종을 솎아내는데요
아내는 무서워 말고 쑥쑥 뽑아내라고
야단이지만 나는 그럴 수가 없습니다

이 어진 똑같은 생명들을
칼처럼 단죄하라니요

하나님도 인간의 심판 날에는
차마 손을 놓고
상심하실 것만 같습니다
     -저자 유양휴 시 [배추밭에서] 전문-

유시인의 시를 대하면 따뜻하다. 그래서 자꾸 읽는다. 자연을 대하여 대화하는 모습에서도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아내를 대하는 태도에서도 선비 같은 깊은 철학이 우러난다. 실금이 쩍쩍 간 찻잔에 차를 대접받고 그 융숭 깊은 차 맛에 아내를 떠올리는가하면 배추를 뽑으며 귀한 생명에 대한 미안함이 묻어나는 글 또한 따뜻하지 않는가.

수석의 대가라서 일까. 그래서 자연에 대한 경외심이 두터운지도 모른다. 20여 년 전 저자의 첫 시집을 받아 읽으면서 짧은 서정시에 함축하고 있는 <내시경>을 읽어보면, 柛만이 알고 있는/ 신비의 지하 동굴// 그 구석구석을 더듬고 나니/ 산 하나가 통째로 비어버린다// 비밀이 없다는 것은 참 허망한 상실이다.

<집중> 물독 같은/ 三更// 비수처럼/ 마음을 갈아// 백지 위에/ 마침표 하나 찍을 자리를 골똘히 찾고 있다.

두 편 정형의 짧은 시가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읽을 때마다 처음 대했던 감동이 살아난다. 그리고 다시 저자의 배추밭에서를 읽으니 처음 시집을 받아 읽을 때의 감동과 느낌이 다시 우러나온다.

실한 모종을 살리기 위해 사람들은 이기심을 발휘해야한다. 사람도 오로지 자기 종자 보존을 위해 이기적 유전자만을 생각한다고 한다. 사람들은 그 이기적 유전자 법칙을 식물에게도 적용한다. 튼튼하고 잘 클 수 있는 것만을 남기고 사정 두지 않고 솎아 내거나 잘라낸다.

그런데 저자는 그게 마음에 걸린다. 똑같은 생명을 하나님처럼 단죄하라니 상심이 컸으리라. 시인이란 모름지기 생활 가운데서도 시처럼 산다. 그래서 어떨 땐 바보 같다. 추구하는 대로 얻는 것 같다. 돈을 추구하는 사람은 돈을 궁리하므로 돈을 얻고 명예를 추구하는 사람은 또 그렇게 얻는 것 같다. 그런데 시 쓰는 사람들은 글만 읽는 ‘간서치’들로 글만 읽는 바보들이 많다. 시에서 쌀이 나오나 뭐가 나오나 생각해본다. 내가 시를 시작할 때 그때로 돌아간다면 시는 안 쓰겠다. 아니 장담할 수는 없다.

정옥임 시인|master@thegolftimes.co.kr
< 저작권자 © 골프타임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정옥임 시인
1996년 ‘문학21’로 등단, 황진이문학상 등 다수의 문학상을 수상했다. 현대시 영문번역에 남다른 열정을 쏟아온 시인은 ‘시 읽는 사회를 위하여 나는 시를 읽고 시를 쓴다’ 등 시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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