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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옥임의 시詩산책 58회] 지우지 않은 전화번호

기사승인 2020.03.11  09: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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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우지 않은 전화번호

너 때문에 속상해
그새 전학 온 친구랑 단짝 됐어?
못 말려! 새끼손가락 건
우리 약속은 다 어디다 뒀니?
충격이다 정말!

손가락 총 한 번 빵! 겨누고 그 길로
요양원 할아버지께 달려가 울며불며
너를 어쩌면 좋으냐고 했더니
“아주 끊지 말고 그냥 있어!”그러시면서

80년 후 할아버지처럼
전화할 곳 없게 되면
틀림없이 네게 전화하게 될 거래
너처럼 양심 없는 애는 오래 살 거래
그래서 네 전화번호 안 지웠어
      -저자 정옥임 시 [지우지 않은 전화번호] 전문-

거의 날마다 지우는 전화번호. 며칠 지나면 꽉 차는 통화기록, 저장만하고 한 번도 걸지 않은 번호. 지우려다 정리하려다 망설이게 되는 이름과 전화번호는 내가 아는, 혹은 알았던 사람의 얼굴이고 인격이고 추억이고 함께했던 시간이고 공간이고 기억이다.

어깨를 나란히 걸었던 골목길이 떠오르고 길을 건너다 떠들면서 음식점에서 나눴던 이야기들! 헌데 저장된 전화번호는 살아가면서 자꾸만 늘어간다. 새로 만나는 사람에 따라 늘어가고 오랫동안 소식 끊긴 사람, 가물가물 떠오르지 않는 사람 다시 연락할 일이 없는 사람은 지워진다. 그런데 가장 가까운 사람의 전화번호, 지우고 싶지만 지울 수 없는 전화번호가 있다. 머릿속에 남아있는 잊을 수 없는 얼굴이 있다. 바로 무촌 남편의 얼굴이다.

절친한 친구인 시인은 다복한 사람이다. 의좋은 남편과 살았고 형제자매와도 우애 있게 살아 내가 부러워하는 친구인데 1년 전에 남편이 지병으로 돌아가셨다. 혼자 있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셋만 모여도 단톡방을 개설한다.

시인도 남편생전에 형제자매가 오랫동안 단체 카톡방을 운영해왔다. 그러다 돌아가신지 1년이나 되었으니 정리 하려했으나 이미 전화를 없앴으므로 단톡 방에서 나갈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 여동생이 전화해서 단톡방 새로 개설하여 초대할 테니 옮기라는 것이었다. 남편과 둘만 남고 방을 다 나갔다. 먹지도 않고 퉁퉁 붓게 며칠 울었다한다. 새로운 방에 초대되었지만 시인은 새 단체 방에서 나오고 말았다. 결국 모두 빠져나갔던 그 방으로 다시 모였다. 그렇게 스마트 폰 가족 방은 다시 유지되어갔다. 지울 수 없는 전화번호와 함께!

정옥임 시인|master@thegolftimes.co.kr
< 저작권자 © 골프타임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정옥임 시인
1996년 ‘문학21’로 등단, 황진이문학상 등 다수의 문학상을 수상했다. 현대시 영문번역에 남다른 열정을 쏟아온 시인은 ‘시 읽는 사회를 위하여 나는 시를 읽고 시를 쓴다’ 등 시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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