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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국의 췌장-림프 등 6종 암투병기 10회] 4와 7 그리고 쓰러진 약병

기사승인 2020.11.17  00:4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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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무맹랑한 기우…매번 마음 다잡으나

[골프타임즈=정병국 작가] 그렇게 절박했소?
암요! 뼈가 으스러지는 것보다 더했단 말입니다.

그냥 지나가는 말 같은 자문에 자답은 마치 억울해서 못 살겠다는 강한 어투에다가 한숨까지 매달았습니다. 그러나 이내 허허 웃습니다. 민망과 겸연쩍은 그러면서도 무엇인가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여러 차례 고개를 주억이다가 헛기침했습니다.

지하철의 개찰 출입구를 들고날 때 ‘4’는 근처에도 가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4’는 곧 ‘죽은 사(死)’ 자(字)로 신앙심이 깊은 사람들도 슬그머니 피하는 숫자입니다. 하물며 중증암환자에게는 그 ‘4’자야말로 수의를 입고 들어가는 관(棺)이므로 기를 쓰고 피할 수밖에요.

시골밥상 된장찌개의 식당에 들어갔다가 탁자가 네 개뿐이라 황망히 돌아섰는가 하면 사천 원 동일 가격의 분식점 음식 안내판이 그렇게 못마땅할 수 없었습니다. 뭐랄까? 저승 자리 가격표 같아 애꿎은 주인만 욕했습니다. 차라리 오천 원 받아요!

그런가 하면 ‘7’은 무조건 환영이었습니다.
이 세상에 없는 행운까지도 가져다줄 ‘러키 세븐’ 숫자에는 무조건 다가갔습니다. 이런 간절한 바람과는 달리 지하철 외에는 ‘7’자 만나기란 하늘의 별 따기입니다. 3호선 충무로역에서 내려 7번 출입구를 찾아보니 약속 장소의 반대 방향 끝이었습니다.

망설일 것도 없이 ‘7’번 출입구로 나와 다시 ‘8’번 출입구의 국민은행 앞으로 걸어갔습니다. 그때 지인들과의 약속 시각이 지나 급한 발걸음이었는데 마음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어차피 늦은 거 조금 더 지각한들 어쩌랴.

이날 ‘7’이 준 행운(?)은 밥과 커피값의 만만찮은 지갑 방출이었습니다. 하지만, 좀 더 맛있는 점심을 샀어야 했는데 미안하다고 허세 떤 것은 분명 ‘기분 좋은 행운’이었습니다. 이런 생뚱맞은 속마음을 털어놓는다면 지인들도 요절복통할 겁니다.

이제는 ‘4’와 ‘7’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개의치 않지만, 아직도 강박관념의 틈바구니에 끼여 긴장의 짜증으로 상처받곤 합니다. 그것은 허무맹랑한 기우라고 매번 마음을 다잡으나 13년째 휘둘리며 악몽까지 꾸기도 합니다.

책장의 아래 서랍 두 칸은 암 투병 복용 약제들로 가득합니다. 하루 7~8차례 먹는 약은 대부분 크고 작은 병과 플라스틱 용기에 들어 있고, 깍지 속의 콩처럼 은박지에 박힌 것도 있습니다. 문제는 플라스틱 용기입니다. 조심스럽게 서랍을 여닫아도 작고 가벼운 플라스틱 용기는 곧잘 쓰러집니다.

뒤늦게 쓰러진 용기를 발견할 때마다 가슴이 철렁합니다. 가지런히 꼿꼿하게 서 있는 약병 속의 쓰러진 용기가 2008년 병원에서 퇴원한 어느 날 죽음의 암시로 덮쳐왔습니다. 앞뒤 상황도 없는 말 그대로 기습의 충격에 휘말렸습니다.

그 이후 오늘날까지 이어진 죽음의 암시 충격은 강박관념으로 깊이 뿌리박혀 절망케 합니다. 결국 최후의 발악하듯 서랍 속의 모든 용기를 쓰러뜨려 놓고 자기최면을 걸기도 했습니다. 봐라! 이래도 죽음의 암시인가?

새벽 3시 51분, 조심스럽게 서랍을 엽니다.
쓰러져 있는 용기 하나. 조심스럽게 바로 세워놓으며 삼라만상 온갖 신에게 기도합니다. 당신들 뜻에 어긋나도 약병처럼 쓰러지지 않은 모습으로 그리 살게 하소서.

‘쓰러진 약병’

약병 두 개
예비약통까지 이십 개도 넘는
그 틈바구니에 누워 있다

서둘러 제자리에 세우다가
밀려드는 불안으로 어쩔 줄 모르는
창밖 비오는 날의 오후

쓰러진 약병이
죽음의 예고가 아님을 잘 알면서도
무너지는 가슴

애써 눈 감고
아버지와 가제 잡던
초가 앞 도랑으로 내닫다가
시퍼런 하늘
신들에게 기도한다

당신들 뜻에 어긋나도
약병처럼 쓰러지지 않은 모습으로
그리 살게 하소서

소설가 정병국
도서출판 지식과사람들 대표, 문예계간 시와수상문학 발행인, 한국문협 회원으로 월간 현대양계에 콩트 연재중이다. 시집 ‘새 생명의 동행’, 소설집 ‘제3의 결혼’ 외 다수가 있다.

정병국 작가  master@thegolftimes.co.kr
<저작권자 © 골프타임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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