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ault_top_notch
ad47

[정병국의 췌장-림프 등 6종 암투병기 21회] 완치 향해 끊임없이 달리는 암환자

기사승인 2021.02.02  00:11:55

공유
default_news_ad1

- ‘묵언기도!’…오늘은 당신을 위해 두 손 모읍니다

[골프타임즈=정병국 작가] 누구였을까?
라면상자 골판지의 한쪽을 찢어 빨간 매직으로 ‘묵언기도하세요!’라고 쓴 사람은.

대설주의보의 함박눈을 바라보며 상황버섯차를 마시다가 문득 떠오른 글자에 난감했습니다. 2011년 여름의 청계산 자락에서 맞닥트린 붉은 글자가 10년이 지난 한겨울에 불쑥 나타나다니 이해불가였습니다. 이게 뭐지? 라는 의문도 잠시, 불길한 생각이 앞섰습니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에도 놀란다’는 속담처럼 지레 겁부터 먹었습니다. 췌장암 등 투병 중 의사의 처방에 역행한 사실이 있나 더듬었지만, 고분고분 말 잘 듣는 착하고 인내심 강한 환자였습니다. 그 증거가 바로 멀쩡히 살아 있는 오늘의 저입니다.

2019년 1월 30일 적조처럼 암이 전이된 위, 담낭, 십이지장을 다 잘라냈습니다. 췌장도 다시 40%를 절제한 후 소장에 이식하는 큰 수술을 받았습니다. 특히 췌장암 재발 환자는 수술을 해도 대부분 그 예후가 좋지 않습니다.

그러나 저는 림프선암까지 겹쳐 8개월의 항암치료를 받으면서도 문예계간 ‘시와수상문학’을 발행하는 한편 장편과 중단편 소설집 4권에 산문집 1권, 시집도 출간했습니다. ‘새 생명의 동행’ 표제 시집은 바로 이 글을 쓰고 있는 투병기의 원작입니다.

역설적이지만, 죽음을 눈앞에 둔 중증암환자였기에 가능했던 작품집 출간입니다. 곧 다가올 봄에는 단편소설 집과 2012년부터 월간 ‘현대양계’에 연재한 콩트집을, 그리고 가을에는 여러 문예지에 발표한 수필과 컬럼을 모은 산문집도 출간할 예정입니다.

이 모든 것이 그냥 건강한 노인이었다면 상상할 수 없는 문학 결실입니다. 또 작은 출판사로 문인들의 시집, 시조집, 수필집 등 작품집 출간에 힘을 보탤 수 있는 것 역시 ‘암의 덕’입니다. 미친 듯 일하는 이 모든 것에는 동행자 ‘암’이 있기에 가능했습니다. 때문에 저는 암을 새 생명으로 받아들였습니다.

투병 15년을 한 묶음으로 살펴보다가 고개를 숙였습니다. 눈을 감았습니다. 상황버섯 찻잔의 온기를 두 손으로 감싸며 까맣게 잊었던 그날을 떠올렸습니다. 일주일에 두세 차례 찾는 청계산 약수터의 발길이 샛길로 빠지면서 골판지의 ‘묵언기도하세요’를 만났습니다.

서둘러 암 투병 노트를 찾으려다가 포기했습니다. 2019년 11월 20일 췌장암 재발 진단에 절망과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투병노트를 발기발기 찢어버렸습니다. 또 ‘췌장암, 그 후 십년’ 투병 성공 프린트도 찢어버린 후 컴퓨터의 데이터까지 깨끗하게 삭제했습니다.

그날을 회상할 수 있는 근거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희망을 갖고 외장하드와 모든 USB까지 샅샅이 뒤지다가 ‘환우를 위한기도’를 발견했고, 그 시가 ‘새 생명의 동행’ 시집에 수록돼 있음을 알았습니다.

골판지가 팻말로 바뀐 시를 읽으며 비로소 ‘이해불가’였던 난제가 풀렸습니다. 쏟아지는 함박눈을 바라볼 때 ‘묵언기도하세요’가 문득 떠오른 것은 암 투병의 자만심에 보낸 경종이었습니다. 마치 암으로부터 자유로워진 건강한 사람처럼 행동하는 내게 보낸 경고였습니다.

다시 암 환자로 돌아가 철저히 투병할 것입니다. ‘완치 기적’을 욕망하는 환자가 아니라 ‘완치를 향해 끊임없이 달리는 환자’로 돌아가겠습니다. 암환자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는 성실한 투병으로 내일을 향하겠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빨간 매직으로 쓴 ‘묵언기도하세요!’
쾌유했을 당신의 행복에 두 손 모읍니다.

환우를 위한 기도 / 정병국

산줄기 끝자락
소나무 숲속의 색 바란 팻말
묵언기도하세요

산 정상도 아닌
정기 받을 하늘도 없는
새둥지보다 작은 공간의 기도처
눈 감는다

촛불 흔들림에도
파삭 부서질 것 같은 암환자들
혈액종양과 진료대기실의 풍경에
진저리치던 가슴

동병상련의 아픔
기어이 터지는 탄식에
합장으로 신에게 호소한다

삼라만상의 신들이여
묵언기도의 통곡소리 들리시나요
세상 모든 환자에게
기적을 베푸소서

소설가 정병국
도서출판 지식과사람들 대표, 문예계간 시와수상문학 발행인, 한국문협 회원으로 월간 현대양계에 콩트 연재중이다. 시집 ‘새 생명의 동행’, 소설집 ‘제3의 결혼’ 외 다수가 있다.

정병국 작가  master@thegolftimes.co.kr
<저작권자 © 골프타임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ad73
default_news_ad4
default_side_ad1

인기기사

포토

1 2 3
set_P1
default_side_ad3

섹션별 인기기사 및 최근기사

default_setNet2
default_bottom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