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생의 기로에 서서
▲ (삽화=박소향) |
[골프타임즈=김학규 시인] 내가 운영하는 사업장은 용산전자상가 단지에 있다. 새천년이라는 2000년 이후부터 시장은 오프라인에서 온라인 시장으로 바뀌어 가는 추세였다.
용산전자상가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은 그런 변화가 낯설어 갈팡질팡했다. 그러는 중에도 온라인 시장으로 흐름이 바뀌며 활성화 되는 택배업체들의 움직임이 더욱 더 눈에 띄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 자리를 찾던 아들은 동분서주했지만 취직이 쉽지는 않았다. 취업을 쉽게 하지 못하고 있는 아들에게 개인 사업으로 택배 사업을 해 보지 않겠냐고 권해 보았지만 아들은 노가다라서 싫다며 단칼에 거절을 했다.
아내도 하나 뿐인 아들을 노가다나 시키려 한다며 짜증을 냈다. 내 느낌으로는 택배 업종이 앞으로는 유망할 것 같은 생각으로 권유를 해 보았으나 아들이 받아들이지 않으니 어찌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아들이 공부를 잘 해서 스펙이 좋으면 취직은 쉬울 터였지만, 취직을 하려고 3개월 정도 헤매기만 했다, 어느 날 아들이 나에게 아버지 뜻대로 택배 사업을 해 보겠다고 했다. 나는 너무 뜻밖이고 반갑기도 해서 1톤 화물 탑차 한 대를 사 주었고 아들은 택배업을 시작했다.
첫 달의 수입금은 40만원 정도였지만 일 년이 지나니 월급쟁이의 초봉 수입처럼 수익이 올랐다. 유망 업종이니 근면해야 하고 성실하게 일하다 보면 수입이 더 좋아질 것이라며 아들을 격려해 주었다.
용산전자상가에 오고 가는 사람들은 거의 다 사장들이니 만나는 사람마다 인사하고 열성적으로 일하는 모습을 보여주라고 알려 주었다. 상인들과의 지엽적인 연고로 여러 모임에 가입하여 활동하도록 권유도 했다.
아들은 용산전자상가 단지에서 씩씩하고 일 잘하는 청년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친목 모임에서 제법 규모가 큰 회사를 운영하는 사장이 나에게 우스갯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형님, 택배하는 튼튼한 녀석이 아들이라면서요?”
“으응, 그래 씩씩하지?”
“왜 그런 힘든 일을...우리 회사로 보내주면 내가 잘 키워 줄텐데요.”
“아니야, 나도 다 생각이 있어, 열심히 하고 있으니 그냥 놔두고 너희 회사 택배 분량이나 울 아들 도와주면 좋겠다.”
15년이 지난 지금 아들은 결혼도 했고 손주도 둘이나 낳았다. 나이 40을 넘겨 이제는 경제적으로도 불편함 없이 생활을 하고 있다. 용산전자상가 단지의 XX택배 센터장으로 부상도 했다.
예닐곱 명의 팀원을 구성하여 리더로서 택배업에 성실하게 종사하고 있는 아들의 수입금은 아비인 나를 추월할 정도이다.
무엇보다도 며느리가 아들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이 가장 흐뭇했다. 손주 녀석들도 엄마의 교육 덕분이겠지만 할아버지라고 하면 엄지 척하며 재롱도 부리고 매달리며 장난을 친다.
젊은 시절 살아가는 방법을 몰라 찾지 못하고 멍청히 시간만 때우며 방황했던 때가 생각이 났다. 태어난 자체가 신의 섭리니 무엇으로든 살아가게 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아버지는 병마로 일찍 세상을 떠났다. 비빌 언덕조차 잃어버린 어린 마음은 어떻게 해아 할지를 몰랐던 그 때는 서럽기만 했었다.
그래서 어떡하든 성공해서 살아 보려고 둘째 형의 도움을 받아 첫 직장에서 9년 8개월을 근무하게 되었다. 주어진 여건에 이것뿐이라는 일념으로 직장 생활에 열성으로 임했다.
근면한 성격과 성실함을 인정받아 회장님이 주례도 서주었고 승진을 거듭하여 부서장에도 이르렀다.
나는 경험을 기반으로 아들의 인생 진로를 알려 주었고, 성실함이 승부수라고 가르쳐 주었다. 그래서인지 아들은 개인사업자로서 경제적인 안정을 찾으며 자영업자 사업을 잘 하고 있다.
나의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 중에 하나를 말하라면 방황하던 아들을 택배업종에 추천하여 성공하도록 도와준 일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시인 김학규는
시와수상문학 운영위원장, 한국 창작문학 서울본부장, 계간문예 작가회원으로 활동하며 '창작 활동'에 남다른 열정을 쏟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