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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겸의 연예코치] 배부른 돼지와 배고픈 소크라테스, ‘먹방’ 인문학의 선택은?

기사승인 2017.08.18  07: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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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 그리워하는 인간미 배제되고 탐닉하는 MC들의 난장만 난무 ‘시청자와 소통 부재’

▲ 사랑과 배려의 철학이 깃들어 있는 한국인의 밥상, 밥상에 깃든 삶의 의미를 되짚게 하는 음식은 철학이며 사랑이다.

[골프타임즈=김정겸 칼럼니스트] 도도한 흐름의 속칭 ‘먹방’(먹는 방송)이 요즘은 약간 주춤하고 있다. 필자는 이전부터 먹방의 한계에 대해 이야기를 한 바 있다(담쟁이 인문학 : 청어). 그러면 먹방이 장수할 수 있는 조건은 무엇일까?

“무엇인가를 누구와 함께 먹는다”는 것은 친근감의 표시이고 사랑의 표시이다. 따라서 혼자라는 말인 ‘독거, 혼밥, 혼술’이 유행하는 이 시대는 사랑과 배려가 결여되어 있는 삭막한 시대임에 틀림없다. 같은 회사의 일원이 되거나 결혼하여 산다든가 할 때 우리는 “한 솥 밥을 먹는다”라고 이야기 한다. ‘한 솥 밥’에서 ‘솥’의 의미를 따져보자.

우리의 삶에서 ‘솥’은 생활의 필수조건인 의식주(衣食住) 가운데 ‘식’을 해결해 주는, 밥을 짓는 중요한 도구다. 솥의 한자로는 부(釜)·노구(鑪口)·정(鼎)이 있다. 일반적으로 솥을 지칭할 때는 가마솥 부(釜) 자를 많이 쓰지만 솥 가운데 필자는 ‘정(鼎)’을 살펴 밥 먹는 행위를 강조하고자 한다.

부(釜), 노구(鑪口)는 그냥 솥의 의미만 있을 뿐 다른 특별한 의미가 없다. 그러나 솥 정(鼎)은 중요한 상징과 의미를 갖고 있다. 옛 중국 순(舜)임금의 뒤를 이어 천자가 된 우(禹)임금은 천하를 아홉 주(九州)로 나누어 다스리며 구주의 관리들에게 돈을 거두어 구주의 평화를 상징하는 아홉 개의 솥 즉 구정(九鼎)을 만들었다.

따라서 정(鼎)은 예부터 하늘의 일을 상징하고 변혁과 혁신을 통해 크게 길함과 형통함을 상징하였다. 정립(鼎立)이라는 단어는 ‘솥발과 같이 세 곳에 나누어 삼’, 정족(鼎足)이라는 단어는 “솥이 세 발이 있는 것처럼 서로 서로 의지하고 보좌함”을 의미하는 것처럼 솥은 함께 함이며 배려함을 의미하는 상징어이기도 하다.

필자는 인문학이 있는 그래서 사람의 어울림,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음식 이야기를 하고 싶다. 음식 인문학을 하고 싶다.

무엇인가를 함께 ‘먹는다’는 것은 ‘화합(和合)’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화(和)를 파자하면 쌀이 나오는 벼(禾:벼화)와 입(口:입구)로 이루어 졌기 때문이다. 즉 평화(和)롭게 밥을 나누어 먹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을하면 풍요롭다고 표현한다. 그 이유는 ‘가을 추(秋)’하면 벼(禾)를 불(火)에 익혀 먹기 때문이다. 어디로 이사 간다고 할 때 옮긴다는 의미의 이사의 ‘이(移)’도 벼(禾)가 많이 나는(多:많을 다)쪽으로 옮겨간다는 뜻이다.

이처럼 먹는 다는 행위는 우리 삶에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런 의미에서 먹방은 의미가 있다. 그러나 인문학적 요소가 빠져있는 먹방은 삶을 오히려 고달프게 한다. 그래서 ‘자유론’의 저자인 영국의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은 "만족한 돼지보다 불만족한 인간이 되는 편이 낫고, 만족한 바보보다 불만족한 소크라테스가 되는 편이 낫다"라고 했다.

삶을 고달프게 하는 원인을 두 가지로 살펴보자면 첫째, 경제학적으로는 ‘엥겔계수’를 높이기 때문이다. 먹방은 엥겔계수를 높이는 방송이다. 엥겔계수란 식료품비가 소비지출 중에서 차지하는 비율을 말한다. 따라서 소득이 높아짐에 따라 엥겔계수는 점차 감소하는 반면에 문화적인 만족을 얻기 위한 지출이 높아진다. 문화는 정신을 지배한다. 먹방은 문화가 있는 방송이어야 한다. 따라서 먹방의 고품격을 위해, 장기 프로그램이 되기 위해 인문학은 필수적이다.

두 번째, 심리학적으로는 저급한 욕구를 충족시키는, 즉 배부른 돼지만을 만들어 내는 방송이다. 미국의 심리학자 매슬로(Abraham H. Maslow)의 ‘욕구 단계설’에 따르면 음식이나 산소, 물, 영양분을 섭취하려는 욕구를 생리적 욕구라고 한다. 단순히 생물학적 존재로서 느끼는 욕구로서 원초적인 돼지 같은 욕구이다. 그렇다고 필자가 이 생리적 욕구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필자도 충분할 정도의 음식을 섭취해야 활동할 수 있기에 꼭 필요한 욕구임을 인정한다.

다만 먹방이 사람 그리워하는 인간적 요소가 빠져있고 그저 MC들은 시간이나 재고 있고 소리를 질러가면서 귀를 어지럽게 하는 사람들일 뿐이라는 것이다. 스토리가 없어서 지겹다. 전 국민을 돼지가 될 것이냐, 아니면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될 것이냐. 그것이 문제이다.

방송이 질긴 생명력을 가지려면 인문학적 요소가 가미되어야 한다. KBS1 ‘한국인의 밥상’이 대표적이다. JTBC '셰프원정대-쿡가대표‘, SBS ’백종원의 푸드트럭‘, tvN '집밥 백선생', JTBC '냉장고를 부탁해' 등을 '한국인의 밥상'과 비교해 보자.

전자의 프로그램은 오로지 먹는 행위에만 집중한다. 사람 살아가는 냄새가 없다. 오로지 쇼만이 있을 뿐이다. 감동이 없어 시청자의 가슴을 울리지 못한다. 철학이 없어 시청자와 소통이 없다. 감동이 없고 소통 없는 프로그램을 시청자는 식상해한다.

'한국인의 밥상'에는 사랑과 배려의 철학이 깃들어 있다. 이 프로그램에는 배고픈 돼지의 모습이 아니라 소크라테스를 담고 있다. 음식에 깃들어 있는 유래와 그 음식을 먹을 대상인 자식을, 아님 남편을, 어머니를,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음식을 만든다. 가난한 시절에 먹었던 음식이 오늘날 나에게 삶의 의미를 되짚어 보게 하기 때문에 “음식은 철학이다”라는 메시지를 던지는 프로그램이다.

필자는 우리 아버지의 콩국수, 우리 아버지의 봄동, 우리 아버지의 고추부각을 그리워한다. 대학 다닐 때 아버지는 필자가 그리울 때마다 예의 음식을 정성껏 만들어 서울 이문동 자취방으로 올라오셨다. 그 음식을 먹을 때마다 아버지를 그리워한다. 따라서 음식은 사랑이다.

‘한국인의 밥상’에는 이런 스토리가 있어서 장수하는 프로그램이 되었다. 배꼽 쥐는 웃음은 없다. 가난하여 배고팠을 때 먹었던 음식, 그 음식에 깃들어 있는 애환과 필자처럼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워하여 찾는 음식, 이렇듯 음식에는 스토리가 있어야 한다. 머리로 먼저 보고 입으로 맛보는 그런 프로그램이 필요하다.

1925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아일랜드의 극작가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는 “음식에 대한 사랑처럼 진실한 사랑은 없다”라고 했다. 이제 먹방도 진실한 사랑을 보낼 준비를 해야 한다. 그래야 시청자도 오랫동안 그 음식을 기억하고 그 방송을 사랑하게 될 것이다.

김정겸 칼럼니스트|master@thegolf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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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 김정겸
철학박사, 文史哲인문학연구소장, 현재 한국외국어대학 겸임교수로 재직 중에 있다.

※ 본 칼럼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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