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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혹한 골프정치사] 골프 배우다 쫓겨난 브리앙

기사승인 2016.10.26  01:2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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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국 총리가 만나서 잠시 한때를 보내는 골프장의 장면 하나가 꼬투리

▲ 세력 앞에 물러난 브리앙, 반대 세력은 영국의 총리 로이드조지에게 골프를 배운 것을 트집 잡아 그를 총리 자리에서 낙마시켰다. 조이드조지(왼쪽)에게 골프를 배우는 브리앙(오른쪽)

로이드조지에게 배운 것이 골프뿐이겠는가? 정책도 배웠을 것이다. 독일에 유화적인 것도 정책도 배운 것이다... 결국 브리앙은 사임했다.

[골프타임즈=안문석 작가] 아리스티드 브리앙은 20세기 초 프랑스의 총리를 11번이나 하면서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질서를 정리하는 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다. 나폴레옹 3세의 몰락 이후 성립된 제3공화국(1871~1940)은 내각제의 권력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대통령이 있긴 했지만 의회에서 선출되는 실권 없는 자리였고, 의회 중심으로 정치가 이루어졌다. 총리가 실권자였다. 그런 총리를 브리앙은 11번이나 했다. 정정(政情)이 불안해 정권이 자주 바뀌었기 때문이다. 브리앙의 가장 중요한 업적은 로카르노 조약과 켈로그-브리앙 조약이다. 로카르노 조약은 1925년 10월 스위스 남쪽 로카르노에서 주요 의제가 합의되었다.

정식 체결은 12월 런던에서 이루어졌다. 조약의 핵심 내용은 제1차 세계대전 패전의 대가로 독일이 내놓은 라인란트(라인강 연안 지대)를 영구 비무장지대로 한다는 것과 영국과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벨기에가 서로 침략하지 않고 침략을 받으면 공공 대응한다는 것이다. 조약 체결 이듬해 독일은 국제연맹에 가입했다. 1936년 3월 히틀러가 라인란트를 군사적으로 점령할 때까지 유럽의 평화를 유지하는 데 기여한 조약으로 평가된다. 브리앙은 프랑스 외교 장관을 하면서 조약 체결을 주도했고, 독일의 외교장관 구스타프 슈트레제만과 함께 1926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켈로그-브리앙 조약은 국가의 대외 정책 수단으로 전쟁을 영구히 포기한다는 내용의 다자간 조약이다. 당시에도 프랑스 외교장관을 하고 있던 브리앙이 세계 최강대국으로 떠오른 미국의 국무장관 프랭크 켈로그에게 제안해 1928년 8월 체결되었다. 부전조약(不戰條約, Treaty of the Renunciation of War)이라고도 한다. 분쟁 해결 수단으로 전쟁을 사용하는 것은 불법이며, 평화적 수단으로만 해결하도록 규정했다.

미국과 프랑스, 영국 등 15개국이 가입했다. 위반에 대한 제재를 명문화하지는 못했다.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후 끊임없이 계속되어온 전쟁을 없애겠다는 극히 이상적인 내용으로 실현 가능성은 거의 없었지만, 이 조약의 정신은 이후 국제연합헌장을 만드는 데 크게 기여했다.

브리앙은 11번 총리를 하는 동안 부침을 거듭했는데, 1922년에는 의회의 불신임을 받고 물러났다. 그 당시 이유는 영국 총리 데이비드 로이드조지한테서 골프를 배웠다는 것이었다. 이런 어이없는 일이 어떻게 발생했을까?

1920년대 초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을 어떻게 다룰지를 두고 대립했다. 프랑스는 독일은 언제든 다시 일어나 유럽 정복에 나설 수 있기 때문에 강경하게 다뤄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래서 독일이 제1차 세계대전에서 지면서 부담하게 된 배상금도 철저하게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1921년 확정된 독일의 배상금은 1,320억 금마르크였다. 달러로는 330억 달러 정도 되었다. 하지만 독일은 첫해 35억 금마르크를 내고는 지불 불능을 선언해버렸다.

이를 보고 영국은 배상금을 감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프랑스가 동의해주면 영국이 서부 유럽에서 전쟁이 일어나는 것을 막겠다고 제안했다. 독일이 프랑스를 침공하면 적극 돕겠다는 말이었다. 1922년 1월 프랑스 총리를 하고 있던 브리앙은 영국의 제안에 긍정적이었다. 독일을 지나치게 압박하면 오히려 강경하게 나올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실제로 독일은 고립을 벗어나기 위해 러시아와 관계 개선에 나서고 있었다.

이러한 브리앙의 입장에 의회는 반대했다. 프랑스 국민의 여론을 잘 알고 있는 의회는 독일에 대해 강경하게 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브리앙을 불신임하고 독일에 대해 강경한 레몽 푸앵카레를 총리로 선출했다. 브리앙의 반대파는 그를 총리에서 몰아내고 싶었다. 물론 반대파의 우두머리는 푸앵카레였다. 하지만 명분이 필요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정책적인 것보다는 감성적인 것이 축출의 명분으로는 더 효과적이었다. 그들은 브리앙의 행적을 예의 관찰했다. 그러던 차에 브리앙이 로이드조지를 만났다. 로이드조지와 골프하는 일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곧 신문에 사진과 함께 기사가 실렸다. 반대파는 ‘이때다’ 하면서 브리앙을 몰아붙였다.

“로이드조지에게 골프를 배웠다. 배운 것이 골프뿐이겠는가? 정책도 배웠을 것이다. 독일에 유화적인 것도 로이드조지에게 배운 것이다.”

이런 주장을 한 것이다. 결국 브리앙은 견디지 못하고 사임했다. 당시의 동영상을 유튜브에서 찾을 수 있다. 1921년 11월 14일, 두 총리는 양복에 중절모 차림으로 골프에 나선다. 장소는 칸 영화제로 유명한 프랑스의 지중해 도시 칸에 있는 한 골프코스로 링스 코스(해안지대에 조성된 골프 코스)다. 로이드조지는 담배까지 물고 있다. 로이드조지는 열심히 설명하고 자세도 봐주는데 브리앙은 계속 뒤땅을 친다.

티샷을 한 공이, 흙이 뛰길 만큼 심한 뒤 땅 바로 앞에 떨어진다. 로이드조지가 직접 주워서 다시 해보라고 한다. 그저 양국 총리가 만나서 잠시 한때를 보내는 그림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런데 이 장면 하나로 브리앙은 총리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브리앙은 이후 다시 재기해 외무 장관, 총리를 하면서 국제 평화를 위해 많은 일을 했다.

안문석 작가|master@thegolftimes.co.kr
< 저작권자 © 골프타임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출처 : 대통령과 골프 저자 안문석 / 도서출판 인물과사상사 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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