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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플레이어] 닉 프라이스, 피나는 연습으로 메이저대회 결실

기사승인 2017.12.21  08: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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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2년 이후 18차례 우승, 레드베터 골프 스승...2015년 프레지던츠컵 인터내셔널팀 단장

▲ 닉 프라이스는 비행기 조종, 낚시, 모형비행기 날리기 등 다양한 취미 활동을 즐기는 골퍼로도 유명했다.

[골프타임즈=정노천 기자] “우승할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은 처음부터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메이저 타이틀을 연속해서 거머쥔다는 게 이토록 감격적인 일인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당시(1994년) 37세, 축구나 육상 종목이라면 퇴물로나 여겨질 나이지만 닉 프라이스(Nick Price, 남아프리카공화국)는 2개의 메이저대회를 석권하며 세계 골프계를 흔들었다. 대 역전극을 연출했던 브리티시오픈과 첫날부터 선두 행진을 이어간 PGA(미국프로골프) 선수권은 프라이스가 연출한 작품이었다.

해마다 스타 탄생을 기대하며 대회를 지켜보는 골프팬들은 프라이스의 절묘한 어프로치샷과 그림같은 퍼팅에 매료됐고 경기 종료 직전까지 냉철한 플레이를 구사하는 프로 근성에 갈채를 보냈다. 녹녹치 않은 실력과 경기 감각으로 출몰하는 골프 스타들을 잠재우는 프라이스의 위력 앞에 영국과 미국의 텃세는 무릎을 꿇었고 분전하지 않는 자국 선수들을 원망스런 눈길로 야유를 보냈다.

1992년 PGA선수권에 이어 메이저대회 3승을 기록한 아프리카의 자존심 닉 프라이스는 1992년 8월, 늦은 35세의 나이에 메이저 대회 반열에 명함을 올려놓았다.

1957년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해양도시인 더반에서 태어난 프라이스는 어릴 때 짐바브웨로 이주하며 성장했다. 골프와 인연은 10세를 전후한 무렵으로 스윙 감각이 천부적이었으며 기량이 뛰어났다. 중고교 시절 아마추어 골퍼로서 아프리카 전역을 뒤흔들 만큼 실력이 성장했다.

청소년기의 골프는 프라이스에게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아프리카와 유럽이 주 무대였던 시절, 프라이스는 자신의 진로를 모색하면서 프로골퍼가 되기를 결심한다. 아프리카와 유럽을 돌며 세계 골프의 면면을 파악하면서 성공할 수 있다는 신념을 키웠다.

당시 프라이스는 자신의 골프 인생에 없어서는 안 될 의인을 만난다. 유명한 데이비드 레드베터였다. 두 사람의 관계는 짐바브웨의 아마추어 골프대표 선후배 지간이었다. 프라이스보다 4살 위였던 레드베터는 장래가 촉망되는 후배를 위해 갖가지 스윙 폼을 시험하면서 장기인 숏게임 기술을 전수했다.

프라이스가 프로가 된 후 스윙개조에 가장 큰 영향력을 준 사람도 레드베터였다. 레드베터는 닉 팔도(영국)나 베이커펀치의 스승으로도 알려져 있지만 그의 오래된 제자는 프라이스다. 프라이스가 프로 자격을 획득한 것은 스무살이 되던 해인 1977년, 이후 1983년 PGA투어에 진출했다. 큰 키(183cm)를 자랑하는 프라이스는 미국 투어 활동 1년 전인 1982년 브리티시오픈 2위와 아프리카 대회에서 몇 차례 우승했다.

프라이스는 PGA 투어 데뷔 첫해인 1983년 월드골프시리즈 챔피언에서 우승하며 정규투어 10년간 시드권을 부여받았다. 그러나 순탄할 것 같던 미국 골프 점령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1991년 바이런넬슨클래식서 우승하기까지 그는 8년간 무관의 아픔을 삭여야했다. 짐바브웨에서 미국으로 건너가 골프 하나만을 믿고 생활하던 프라이스에게 8년의 세월은 최대의 시련기였다.

시련은 또 다른 영광을 태동시키는 힘이 되었다. 8년의 기간 동안 자신의 골프 패턴을 개선시키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빠른 스윙 템포를 완만히 조절, 스윙 면을 고쳐 잡고 그립도 스트로우식으로 바꾸었다. 하반신의 동작을 억제하는 능력과 스윙 정확성을 강조했다.

특히 숏게임 완성을 위해 27차례나 퍼터를 바꾸기도 했다. 피나는 연습과정에는 데이비드 레드베터가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조언을 아끼지 않았고 살을 깎는 고통의 결실은 90년대 들어 빛을 보기 시작했다.

샷이 안정됐고 퍼팅은 누구와도 견줄 수 없는 세계 최고로 성장했다. 프라이스는 1991년 2승을 기록하며 상금랭킹 7위에 올라 뚜렷한 상승세를 보였다. 그러나 PGA투어에서 그는 이방인이었다. 1992년 PGA 선수권자로 등극하기 이전까지 어느 누구도 프라이스를 주시하지 않았다. 메이저대회 1승을 올린 후 미국 언론은 프라이스가 골퍼로서 손색이 없음을 마지못해 인정했지만 최소한의 예우에 불과했다.

프라이스는 명실상부한 스타반열에 오르기 위해 10여 년간 즐겨왔던 비행기 조종도 마다하며 골프에 더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 1992년 이후 827라운드 대회에 출전, 16차례 우승을 기록했다. 미국 진출 11년 만에 닉 프라이스는 세계 골프를 평정했다.

2015년 한국 잭니클라우스 골프클럽에서 개최된 대륙 간 골프대항전(인터팀-미국팀) 프레지던츠컵에서 닉 프라이스는 인터내셔널팀 단장을 맡았다.

▲ 골프숍에서 사람들과 환담하는 닉 프라이스

정노천 기자|master@thegolftimes.co.kr
< 저작권자 © 골프타임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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