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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의 편지 박원명화 제24회] 해바라기 사랑

기사승인 2021.12.01  09: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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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식 향한 모정의 사랑은 아랫목처럼 따뜻해

[골프타임즈=박원명화 수필가] 날씨가 추워지고 김장철이 되니 어머니 생각이 난다. 배추를 산더미처럼 들여 놓고는 혼자서 배추를 손수 절여 김치를 담아 이 자식 저 자식의 집으로 보내주시던 어머니, 자식을 향한 모정의 사랑은 아랫목처럼 따뜻하셨다. 언제나 충직한 종처럼 자식을 위해서라면 불이라도 뛰어들 것처럼 열렬히 사랑을 주셨던 어머니, 받는 것에만 익숙한 나는 그 고마운 정성을 모르고 살다가 돌아가시고 나니, 내가 힘들고 외로워지면 어머니가 더욱 그립고 보고 싶어 눈물이 난다.

어릴 적 어쩌다 생선이라도 먹는 날이면 어머니는 옆에서 가시를 발라 살점을 자식들 밥숟가락에 차례차례 올려주고 어머니는 머리나 뼈에 붙은 작은 살점을 발라먹었다. 자칫 목구멍에 가시라도 걸리면 밥 한술에 배추김치를 싸서 얼른 먹이고는 얼른 꿀꺽 삼키라 해놓고도 안절부절 걱정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어쩌다 채기라도 있다 싶으면 바늘에 실을 길게 꿰어놓고 등을 두드려 손을 아래로 쓸어내리고는 엄지손가락 마디에 실을 꽁꽁 묶어 손가락 끝을 바늘로 찔러 피를 빼내었다. 그렇게 검붉은 피가 나오고 나면 답답한 가슴이 시원해지면서 트림이 나왔다. 배가 아프다고 하면 옷 위로 손을 얹혀 슬슬 문지르면서 ‘엄마 손은 약손, 니 배는 똥배’라는 노래를 불러주면 묘하게도 배앓이가 나았다. 지금이야 병원에 가거나 약을 먹으면 쉽게 고칠 수 있지만, 그때는 어머니가 반 의사였고 약사였다.

어머니는 꼭두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종종걸음으로 일속에 묻혀 지냈다. 여자는 약해도 어머니는 강하다고 했던가.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내색하지 않고 그 힘든 농사일을 혼자서 묵묵히 해내셨다. 마치 일하는 게 당신이 살아가는 도리인 것처럼. 우리 집의 가난함 속에서도 나는 막내로 태어난 덕분에 유복하고 훈훈한 사랑을 많은 받고 자라 고생이란 걸 몰랐다.

진자리 마른자리 키워 결혼까지 시켜 살림을 내주고도 뭐가 그리 안타까웠는지 어머니는 먼 길 마다하지 않고 수시로 서울을 오르내리며 우리 집 살림을 도와주려고 애썼다. 퍼내도 퍼내도 마르지 않은 샘물처럼 부모의 자식 사랑은 아마도 죽어서나 없어질 무한한 애정이 아닐까. 일편단심 햇볕만을 향해 기우는 해바라기처럼, 내가 아이 셋을 낳고 기를 동안에도 어머니는 두어 달씩 내 몸이 완전히 회복될 때까지 산후조리를 해주고 가시곤 했다.

그렇게 애지중지 키운 딸자식 이것만 나는 가끔 어머니의 면전에 대고‘나는 절대 엄마처럼 살지 않을 거예요’라는 말을 했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쓴웃음을 짓듯 소리 없이 웃기만 했다. 내가 그런 말을 서슴없이 해댄 것도 어쩌면 내가 더 많이 배웠다는 오만이 아니었을까. 그렇게 당당하고 자신만만하게 말했지만 나는 어머니의 삶을 이어가듯 결혼해 살아보니 밥하고, 빨래하고 집 안 청소하고 순종적인 아내로 길들여 살고 있음을 어이하랴. 내가 어머니 나이가 되어보니 그때 어머니가 느꼈을 그 외롭고 공허한 마음을 조금은 알 듯도 하다.

수필가 박원명화
2002년 한국수필로 등단. 한국문인협회 이사, 한국수필가협회 사무국장이며 제9회 한국문인협회 작가상ㆍ연암기행수필문학상ㆍ제39회 일붕문학상을 수상했다. ‘남자의 색깔, 길 없는 길 위에 서다, 풍경’ 외 수필집 다수.

박원명화 수필가  master@thegolftimes.co.kr
<저작권자 © 골프타임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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