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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옥임의 시詩산책 18회] 간장사리

기사승인 2019.05.22  01: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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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장사리

시어머니 제사 파젯날
베란다 한 구석에 잊은 듯 서 있던 간장 항아리 모셔와
작은 단지에 옮겨 부었다.
20년 다리 오그리고 있던 밑바닥을 주걱으로 긁어내리자
연갈색 사리들이 주르륵 쏟아진다

툇마루도 없는 영주땅 우수골 낮은 지붕 아래
허리 구부리고 날마다 이고 나르던
체수 작은 몸피보다 더 큰 꽃숭어리들
알알이 갈색 씨앗 영글어
환한 몸 사리로 누우셨구나

내외간 살다보면 궂은 날도 있것제
묵은 정을 햇볕삼아 말려가며 살아라
담 너머 이웃집 연기도 더러 챙기며
묵을수록 약이 되는 사리하나 품고 살거라

*먼 길 행상 가는 짚신 발 행여나 즌데를 디디올셰라
명일동 안산에 달하 노피곰 돋아서
어긔야 멀리곰 비추고 있구나*
이승 저승 가시울 넘어 맨 발로 달려오신
어머니의 간장사리.
         -저자 이혜선 [간장사리] 전문-
*백제가요 ‘정읍사’에서 차용

이혜선 시인은 시를 쓰면서 평론가,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 등 여러 직함을 수행하는 그레이트 수퍼 우먼(great super woman)이다. 시인은 몸이 아프면 내게 힘없는 목소리로 전화한다. “나 아퍼!” 첫마디다. 엄마나 믿는 언니에게 하듯 좋잖은 일부터 말한다. 한 참 통화 후엔 서로 목소리에 힘이 생기고 즐겁게 통화를 마치곤 했다. 그리고 함께 했던 잊을 수 없는 그림도 떠오른다. 이 시인의 바깥분이 운전하여 봄이면 나물도 캐러 가고 미술관에도 가곤했다. 그 날도 내가 부부사이에 급히 끼게 되어 입장권은 단 두 장뿐, 망설임 없이 시인과 나 둘만 들여보낸 박희 박사. 그렇게 우리의 번개모임 또한 늘 즐거웠다. 아마 그렇게 지낸 시간 때문에 먼저 베푼 친구에게 어찌 고맙지 아니하겠는가! 나에게는 곁을 비추는 달 같은 친구. 또한 20년 지기지만 한결같아 내 맘 속에 신처럼 모시는 몇 안 되는 친구이기도 하다.

정옥임 시인|master@thegolftimes.co.kr
< 저작권자 © 골프타임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정옥임 시인
1996년 ‘문학21’로 등단, 황진이문학상 등 다수의 문학상을 수상했다. 현대시 영문번역에 남다른 열정을 쏟아온 시인은 ‘시 읽는 사회를 위하여 나는 시를 읽고 시를 쓴다’ 등 시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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