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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프의 재발견11-1 : 지역 명칭을 가진 국내 오픈 대회(1)

기사승인 2013.12.03  18: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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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명칭을 달고 탄생한 골프대회는 지역의 골프발전과 프로 골퍼들의 기량 향상에 기여한다는 취지 아래 창설됐다. 그 첫 주자가 부산오픈이며 이후 많은 골프대회가 창설됐으나 열악한 환경을 극복하지 못하고 단명에 끝났지만 우수 선수 발굴과 지역 골프발전에 지대한 공을 세운 것은 사실이다.

부산오픈골프선수권대회(1979~1981, 1983)
지역 명칭을 가진 최초의 대회이며 지방의 골프 활성화와 지역 골퍼들의 기량 향상에 기여한다는 취지 아래 창설
[골프타임즈=문정호 기자] 부산오픈골프선수권대회는 19798월 지방의 골프 활성화와 지역 골퍼들의 기량 향상에 기여한다는 취지 아래 창설됐다.

부산오픈은 지역 명칭을 가진 최초의 골프대회다. 1978년 동래CC에서 열린 프로테스트를 계기로 재일 교포 최철락, 이문걸 씨 등의 재정적인 후원을 받아 창설됐다. 이는 골프장명 대회나 스폰서대회와는 차별화된 점이다.

특히 골프를 좋아하고 프로골퍼들에게 후원을 아끼지 않았던 부산 지역의 아마추어 골퍼들이 부산오픈골프선수권대회를 창설했다는 점은 프로 골퍼들에게 매우 기쁜 소식이었다.

1981년에 열린 3회 대회까지 국내 골프계의 지대한 호응 속에 치러졌으나 4회 대회(1982)는 골프장 사정으로 열리지 못했으며 5회 대회(1983)2라운드 대회로 치러지는 아쉬움을 남겼다.

1984년에 열릴 5회 대회는 상금 문제, 프로 골퍼들의 참가 범위 등을 놓고 물의를 빚으면서 무산됐다. 그러나 부산 지역의 대표 기업인 동성화학공업()이 스폰서로 나서 대회 명칭을 동성화학 부산오픈골프선수권대회로 바꿔 개최해 대회의 명맥을 계승했다.

대회 개최 장소도 부산 지역을 대표하던 부산CC와 동래CC가 격년제로 번갈아 가며 개최하기로 결정, 골프계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동래CC에서 열린 대회 초대 우승자는 김승학으로 4라운드 내내 언더파를 기록하는 샷의 호조 속에 9언더파 279타를 기록하면서 김성종을 4타 차로 여유 있게 제치고 우승했다.

한편 당시 부산을 대표하던 프로 골퍼 김석봉은 4라운드 합계 3언더파 285타로 김덕주와 공동 3위를 차지하는 선전을 펼쳤다.

총상금 7백만원, 우승 상금 140만원을 걸고 1980년에 부산CC에서 열린 2회 대회는 최윤수가 최종일 4언더파 68타를 기록하면서 3라운드까지 선두를 달리던 이강선을 제치고 우승했다.

부산CC에서 개최된 3회 대회(1981)는 지난 2회 대회보다 총상금이 300만원이나 증액된 1천만원으로 올랐으며, 우승 상금 역시 200만원으로 올렸다. 대회 우승자는 강영일로 4라운드 합계 12언더파 276타를 기록하면서 2위 최상호를 10타나 앞서 여유있게 우승했다.

강영일의 2라운드 8언더파 64타는 부산CC 코스레코드이며 대회 최저 타수 기록이다. 여자부는 구옥희가 우승했다. 당시만 해도 남녀 프로가 함께 경기를 치르던 때였다.

4회 대회(1982)는 한 해 건너뛰어 1983830~31일까지 동래CC(총상금 1000만원·우승 상금 200만원)에서 열렸다. 대회 우승자는 최상호로 2라운드 합계 8언더파 136타를 기록했다. 여자는 김선화가 우승했다.

부산오픈은 4회 대회를 끝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이후 부산오픈은 동성화학공업()이 이어 받았으며 이후 팬텀오픈골프선수권대회로 발전해 국내 프로 골프계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부산CC는 일제 강점기 때인 1932년 부산 남면 수영천 부근에 2610야드 9홀로 개장한 곳으로 제2차 세계대전 때 비행장으로 사용되면서 폐장됐고 1956년 부산 해운대에 개장 196510186330야드로 확장됐다.

이후 19717월 부산CC 해운대 코스가 주택지구로 편입되면서 동래구 노포동에 186402야드 규모로 재조성됐다.

영남오픈골프선수권대회(1992, 1995, 1996)
영남지역의 골프 활성화와 프로골프계의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창설

사진=대구CC에서 열린 1992년 제1회 영남오픈에서 우승자 최상호를 비롯해 대회 관계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영남오픈골프선수권대회는 19927월 대구CC에서 영남 지역의 기업들이 뜻을 모아 지역의 골프 활성화는 물론 프로 골프계의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창설됐다. 지명이 대회 타이틀로 붙은 대회는 1979년 부산오픈 이후 두 번째다.

뚜렷한 스폰서가 없어 1993년과 1994년에 잠시 중단됐다가 1995년 재개되는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결국 1996년에 열린 3회 대회를 마지막으로 중단돼 지역 대회의 한계를 보였다.

1992년에 열린 첫 대회는 최종일 연장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최상호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3라운드까지 권오철이 3언더파를 기록하면서 2위권에 1타 차로 앞섰으나 최종일 경기에서 74타를 기록하며 부진한 반면 봉태하가 6언더파 66, 최상호가 5언더파 67, 박남신이 2언더파 70타로 선전하면서 결국 이들 세 사람이 4라운드 합계 4언더파 284타로 동타를 이뤘다.

당시 최정상을 달리던 최상호가 노련미를 유감없이 발휘하면서 막판 추격에 나섰던 박남신, 봉태하를 연장전에서 물리치고 초대 우승자의 자리에 올랐다.

1995년 경주조선CC에서 열린 2회 대회는 무명의 공연준이 기라성같은 선배들을 물리치고 4라운드 합계 12언더파 276타로 우승하면서 스타덤에 올랐다. 그는 미국에서 골프를 배우고 돌아온 유학파였다.

경주조선CC에서 열린 3회 대회(1996)는 최상호에 의해 또 하나의 한국 기록이 갱신됐다. 그는 2라운드에서 10언더파 62타의 놀라운 기록을 수립했다. 결국 4라운드 합계 15언더파 273타로 여유 있게 우승하면서 국내 최정상임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켰다. 따라서 18홀 최저 타수 기록 10언더파 62타와 역대 최저 타수 우승 기록인 15언더파 273타는 3회 대회 우승자인 최상호가 보유하고 있다.

문정호 기자karam@thegolf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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