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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겸의 연예코치] 홍상수와 김민희, 그들의 사랑을 부정하는 우리의 잣대는 무엇인가?

기사승인 2017.06.16  07: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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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나 아니면 나는 ‘다른 무엇’의 종...당당한 ‘인생 삶의 주인공 ’나‘다

[골프타임즈=김정겸 칼럼니스트] 인간은 누구의 사람, 즉 누구의 아내나 남편, 누구의 자식으로 살기 전에 우리는 우리 그 자체로서 태어나고 그렇게 삶을 살아간다. 내가 누구에 종속된 인간이 아니라 “나”로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나의 본질이 무엇에 규정되어 틀에 박힌 삶이 아니라 나 자신의 삶의 주인공으로서 내 인생을 살아가야 한다. 내가 나 이외의 ‘다른 무엇’에 규정되어 살아간다면 더 이상 나는 나가 아니라 ‘다른 무엇’의 종이 된다.

이런 의미에서 이제는 남편들이 자신을 당당하게 소개하며 주체적인 삶을 살듯이 영부인이 아닌 김정숙 ‘여사’처럼 아내들도 누구의 아내이고 누구의 엄마가 아닌 당당한 ‘나’로 살아가야 한다. 그래서 전업주부도 명함을 파야 한다. 자신의 삶에 당당한 실존적 삶을 살 필요가 있다.

실존적 삶이란 무엇인가? 실존주의는 주체적인 삶을 강조하는 적극적 행동 철학이다. 지금 여기(now-here)에서의 삶은 자신의 것이기에 자유로운 주체적 결단과 책임을 강조한다.

누구도 나의 삶의 주인공이 될 수 없다. 그 무엇인가에 규정[이를 본질(Essence)이라고 하자]되어 버린 ‘나[이를 실존(Existence)이라고 하자]’에게는 자유도 선택도 없다. 그래서 단순히 주어진 삶을 영위해 나가는 생물학적 동물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사르트르의 말처럼 실존이 본질에 앞서는(Existence precedes essence) 삶을 살아가는 주체성이 진리(키에르케고르)인 삶을 살아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민해경의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는 노래가 새삼 가슴에 와 닿는다.

요즘은 이혼하는 사람도 많아 졌다. 심지어 ‘卒婚(졸혼)’이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했다. ‘졸혼’은 2004년 일본의 작가 스기야마 유미코의 작품 ‘졸혼을 권함’이라는 책을 통해 알려지기 시작한 용어이다.

졸혼은 혼인관계는 유지하지만, 부부가 서로의 삶에 간섭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삶을 살아가는 것으로 실존적 삶을 추구하는 현대의 문화적 풍토를 잘 살려낸 말이다.

공동체주의가 강한 우리 정서에서 주체적 삶은 가능할까? 마치 학교를 중퇴하면 성공적 삶을 살 수 없을 것 같은 호들갑 떠는 사회에서 홍상수 감독과 배우 김민희의 사랑은 가능할까? 필자는 몇 가지 점에서 그들의 사랑을 지지한다.

첫째, 두 사람은 공인일까? 아니다. 공인이란 ‘공적인 일에 종사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그네들은 사적인 생업을 위해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사회적 통념상 공인이라고 하자. 공인이기 때문에 개인적 삶마저 포기해야 한다는 것은 너무도 잔인한 말이다.

공인은 타인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고 한다. 물리적인 삶은 얼마든지 그렇게 살아 갈 수 있다. 그러나 정신적인 삶을 어떻게 그렇게 살아갈 수 있을까? 사랑마저도 양화(量化)시키는 세상에서 고귀한 사랑은 없어진다. 이들의 영혼의 교감을 지지한다.

둘째, 그네들의 사랑이 고귀하냐고 반문하는 독자도 있으리라. 그들 둘에게 있어 그 사랑은 지고지순한 것이다. 윤리적인 문제로 반론을 제기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에리히 프롬은 인간의 심리적 성향은 성적 본능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우리가 몸담고 있는 사회, 경제 등의 영향에 대한 반응이라고 본다.

현재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 사회 문화적 현상은 실존적 삶을 추구하고 있다. 가정파탄은 그들 개인의 문제이기 때문에 그들 두 사람이 책임져야할 문제이다. 이제 대중 앞에 당당히 선 그들의 용기 있는 주체적 삶에 박수를 보낸다.

셋째, 에리히 프롬의 ‘Love is Art?’에 대해 필자는 사랑을 기술이 아니라 예술로 보고자 한다. 사랑은 기술이 아니라 예술이다. 사랑에 대한 여러 조건과 자신만이 갖고 있는 신념으로 상대에 대한 사랑을 이해시킬 때 그 사랑은 성공할 수 있다고 에리히 프롬은 말한다.

우리는 성공, 위신, 돈, 권력 때문에 사랑하려 하지 않는다. 그런 사랑을 경계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칸트의 “인간을 수단으로 다루지 말고 언제나 목적으로 다루어야 한다.”는 말을 명심해야할 필요가 있다.

상대방의 사랑을 자신의 성적 욕구 충족이나 성공, 권력의 수단이나 도구로 삼는다면 그 사랑은 참된 것이 아니다. 사회에 만연되어 있는 그런 사랑이 아닌 영혼이 순순한 사랑은 사랑 그 자체로 아름다운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사랑이 더 고귀해지기를 기원한다.

그들의 사랑에 대해서 색안경을 끼지 말자. 그들의 사랑이 순수하지 않다고 판단하지 말자. 그 순수성을 우리가 어떻게 판단내릴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의 사랑 그 자체를 보아 줄 필요가 있다. 사랑은 정신적 문제이기 때문에 사랑을 물화(物化)시키지 말아야 한다. 그렇게 물화 시키는 순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의 정신은 괴물이 되고 말 것이다. 그래서 세상을 왜곡된 상으로 바라보게 될 것이다.

두 사람의 사랑을 지켜 볼 때이다. 그들도 통념상 공인이라고 했을 때 그들의 선택이 훌륭했음을 입증할 필요가 있다. 그들의 실존적 삶, 즉 주체적 결단과 선택, 책임에 대해 지지를 보낸다.

김정겸 칼럼니스트|master@thegolf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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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 김정겸
철학박사, 文史哲인문학연구소장, 현재 한국외국어대학 겸임교수로 재직 중에 있다.

※ 본 칼럼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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