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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국 4千字소설 제22화] 찢어진 청바지 아가씨

기사승인 2018.05.03  12:4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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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도 사랑보다 돈만 냉큼 물어간다고요

[골프타임즈=정병국 작가] 날 흐린 것이 참 다행이었다.

해가 떴다면, 서울역 앞 고가공원은 그늘 한 점 없는 땡볕이었다. 생각만으로도 등에 땀이 차는 것 같아 얼굴을 찡그렸다. 텔레비전의 멋진 화면에 이끌려 찾은 고가공원인데 실상은 허탕이었다. 마치 바위고원에 미처 자라지 못한 나뭇가지 몇 개 꺾어 꽂아놓은 것 같아 사기당한 기분마저 들었다.

“어르신! 드실래요?”

화단 의자에서 그만 일어서려던 참이었다. 옆 자리에 아가씨가 앉으며 어름알갱이가 가득한 컵을 내밀었다. 냉커피였다. 고맙다는 말도 없이 커피를 받아 조금 마셨다.

“어르신! 죄송해요.”

어르신이라며 뜬금없이 죄송하다는 말에 아가씨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어르신이란 호칭을 자연스럽게 사용할 수 있는 연령대가 아니어서 빙그레 웃었다. 어르신이라는 호칭은 적어도 사십은 넘은 여자들이 팔십 노인들을 그렇게 불러야 어울리는 말이었다. 잘 됐어야 스물댓 먹은, 그것도 찢어진 청바지에 늘어진 티셔츠를 걸친 아가씨에게 어르신이라고 불리자 웃음부터 나왔다.

“어르신! 이건 정말 궁금해서 여쭙는대요.”

여쭙는다?

또 웃음이 나왔다. 깍듯한 존칭어에 사기당한 것 같았던 기분이 한순간에 풀렸다. 서울역 앞 고가공원은 한마디로 실망이었다. 여길 어떻게 서울의 새로운 명소라고 아침부터 방송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감쪽같이 속은 기분이었다.

“어르신! 어르신은 할머니를 얼마나 사랑하셔요?”

어르신이라는 존칭을 꼬박꼬박 사용하는 아가씨의 뜻하지 않은 질문에 이번에는 황당했다. 아니, 당황스러웠다. 할머니를 얼마나 사랑하느냐고? 한 번도 생각보지 않은 물음이었다. 부부로 오십 년 넘게 살았지만, 우리는 그런 말을 주고받은 적이 없었다.

“말씀 안 하셔도 돼요. 제가 궁금한 것은…….”

말꼬리를 감췄던 그녀가 재빨리 말을 이었다.

“친구 큰 언니가 얼마 전에 유방암으로 죽었어요.”

한 살 아래인 남편은 결혼 한 달 만에 유방암으로 입원한 아내를 위해 직장까지 그만뒀어요. 하루 스물네 시간 잠시도 떨어지지 않고 간병했지만, 언니는 일 년 만에 저세상으로 떠났어요. 어느 날 문병 갔는데 자기는 행복한 여자래요. 유방암으로 죽어 가는데 행복하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고 했더니 제가 바보래요. 글쎄.

언니는 남편의 사랑을 한없이 받고 떠나는 행복한 여자라 원도, 한도 없다. 그러나 남편이 불쌍해서 견딜 수 없다며 눈물을 줄줄 흘렸어요. 그러다가 남편이 병실로 들어오니까 울음을 뚝 그치고 미소 띤 얼굴로 묻더라고요. 바깥 날씨가 어떠하냐고.

“어르신! 저는요. 언니와 형부 두 사람 다 지금도 이해할 수 없어요.”

두 사람의 애틋한 사랑을 이해할 수 없다는 답답한 표정을 바라보다가 물었다.

“그럼 아가씨가…….”

생각하는 사랑이 무엇이냐고 물으려 할 때 툭 끼어들었다.

“아가씨가 아니라 이고은, 고은이예요.”

“고은이가 생각하는 사랑, 그건 어떤 건가요?”

그녀, 이고은은 고개를 저었다.

“몰라요.”

“모른다?”

“예!”

그녀는 갑자기 장난꾸러기처럼 코를 찡긋하며 웃었다. 어르신 수염이 참 인자하게 보인다며 신기한 눈길로 바라보다가 커피를 마셨다. 그녀를 따라 나도 조금 마시며 수염을 쓸어내렸다.

“이건 또 다른 얘기인대요. 해군하사의 새댁 자살이에요.”

그녀는 인터넷에서 우연히 읽었다고 했다.

결혼한 지 일 년도 채 안 된 신혼부부. 새댁이 인터넷에 이승을 떠날 수밖에 없는 사유를 남기고 자살했다. 해군하사인 새댁의 남편은 근무 중 불의의 사고로 신혼 일 년도 채 안 돼 바다의 고혼이 됐다. 두 사람은 비록 중매로 만나 결혼했지만, 서로를 끔찍이 아끼며 미래를 설계했다. 그러나 새댁은 부부의 살가운 사랑으로 자식 낳아 기르며 행복한 가정을 꾸려보지도 못한 채 절망 속에 빠져야 했다.

새댁은 절망을 이겨낼 수 없었다. 퇴근하여 불쑥 들어오며 환하게 웃는 신랑의 얼굴을 되새기는 것으로 하늘이 무너지는 절망과 슬픔을 이겨보려 했지만, 결국 그녀는 죽음을 선택했다. 비록 짧은 이승에서의 사랑이었지만, 그리움으로 가득 찬 그녀는 남편을 만나기 위해 저승길에 올랐다.

“어르신!”

그녀가 볼멘 목소리로 불렀다.

“사랑 때문에 죽는다? 사랑이 생명보다 더 귀한가요?”

두 번째 당황시키는 질문이었다. 할머니를 얼마나 사랑하느냐는 것이 첫 번째였다. 사랑이 사람의 목숨보다 더 귀한가, 아닌가는 아예 생각한 적이 없었다. 집안 어른들의 중매로 아내를 만나 결혼했고, 아들 딸 둘씩 낳아 기르다 보니 머리가 반백이 됐다. 네 자식을 다 출가시키자 칠십을 훌쩍 넘긴 노인이 됐다. 할멈도 내일 모래이면 고희다.

얼마 전이었다. 점심으로 국수를 먹다가 할멈이 느닷없이 친정에 다녀오겠단다. 장인 장모님이 돌아가신 지가 언제인데 친정이라니 털컥 가슴이 무너졌다. 세월 앞에 장사 없다더니 할멈에게도 치매가 오기 시작했나 싶어 다급히 내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원 영감님도 참! 언제 이름을 불러봤어야 알지요.”

“딴소리 말고 빨리 말해 봐요.”

“독불장군. 됐어요?”“나이는?”

“걱정 마요. 어머니, 아버지 산소를 친정이라고 표현한 거니까.”

그날 국수 그릇을 다 비우지 못했다. 벌컥 화를 내곤 방으로 들어갔다. 뒤따라 들어온 할멈이 치매 증상인 줄 알고 걱정해주는 영감님이 고맙다며 웃었다. 눈물이 그렁한 웃음이었다.

사랑이란 그런 말에는 무관심하게 살아온 내게 ‘사랑 때문에 죽는다? 사랑이 생명보다 더 귀하나요?’라는 질문은 아무런 의미가 없으면서도 당황스러움으로 밀려왔다.

“글쎄? 그것은 사람마다 다르지 않을까?”

“어르신! 저는 어르신의 생각은 여쭸어요.”

이고은, 그녀는 어름이 조금밖에 남지 않은 커피를 빙글빙글 돌렸다.

“저는요. 두 여자가 다 정신병자 같아요.”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리며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암으로 죽어가고 있는데 행복하다? 그게 말이 돼요?”

“그럼 하사관 새댁은?”

“그 여자도 정신 나갔죠. 자살은 왜 해요?”

두 여자는 다 미친 사람들이라며 얼굴을 찡그린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난간을 짚고 아래를 내려다보다가 돌아섰다.

“사랑? 그거 있잖아요. 웃기는 개그 같은 거예요. 장남과 추남은 절대 사절. 경제력은 빵빵할 것. 이런 세상인데 그까짓 사랑이 뭐라고…….”

말을 끝까지 잇지 못한 그녀가 내게 한 마지막 말은 충격이었다.

“개도 돈은 냉큼 물어가지만, 사랑 그따위 거는 거들떠보지도 않아요.”

개도 거들떠보지 않는 사랑?

그 말이 난감해 하늘을 쳐다보았다. 흐린 하늘이지만, 일기예보처럼 비가 올 것 같지 않았다. 그녀도 하늘을 쳐다보다가 갑자기 배꼽 사과를 했다.

“어르신! 죄송해요. 버릇없이 함부로 말씀드려서.”그녀는 다시 배꼽 인사를 하더니 사람들 속으로 사라졌다. 참 한심한 처녀다 싶었는데 그녀가 사라지는 순간 천 길 벼랑으로 떨어지는 후회가 밀려왔다. 어쩌면 사랑의 아픔으로 죽고 싶은 생각에 억지 말만 했을지 모른다. 그렇게 말하면 인생을 하얗도록 산 노인이니 삶과 사랑의 경험을 들려주며 힘을 주리라 기대했을 것이다. 그것을 뒤늦게 눈치 채다니 한심한 건 그녀가 아니라 이 늙은이였다.

화단의 의자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녀, 이고은에게 맛있는 밥이라도 사 먹일 것 잘못했다는 후회로 고개를 저었다. 그녀가 사라진 쪽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정병국 작가|master@thegolf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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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정병국
도서출판 ‘지식과사람들’ 대표와 문예계간 ‘시와 수상문학’ 발행인. ‘문예창작아카데미’와 스마트폰 전자책문학 ‘파란풍경마을’을 운영하며 월간 현대양계에 콩트를 연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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