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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옥임의 시詩산책 28회] 반고흐의 시간

기사승인 2019.08.07  01:2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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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고흐의 시간

올 여름도 온통 당신의 것이다.
빈 센트 반고흐씨
청동의 살갗을 파고드는
저 직립의 햇발아래/ 풀어헤친 머리카락이 갈가마귀 같은
맨발의 여자들도 모두 당신 앞에 도열한다.

내 오랜 그 때부터
예사로 넘길 수 없었던 빈 센트 반고흐씨
당신의 캔버스는 되디된
크레파스를 뭉개는 사철의 용광로
사자나루 같은 꽃잎을 늘어뜨린
해바라기와 밭두렁에 키 큰 옥수숫대가
말라비틀어진 수염을 달고 있는 걸 보았을 때 진작 알았어야했다.

내가 지금 어디쯤 와 있는지를, 그리고 시절이 무던히 깊었다는 것을,
고흐씨 당신이 아니라면 아무리 삼복이라도
이렇게 가슴까지 끓어 넘치지는 않을 것이다.
해마다 내 여름은 당신 때문에 아슬아슬 줄을 타듯
아무도 눈 여겨 보지 않는 핏방울이 맺힌다.
      -저자 이향아 [반고흐의 시간] 전문-

지면에서 무심코 좋은 시를 만나게 되면 금덩이를 발견한 것처럼 눈이 번뜩여진다. 이향아 시인께서는 끊임없이 좋은 시를 발표한다. 좋은 글은 읽는 이에게 깊은 감동을 줄 뿐 만아니라 글감까지 덤으로 생기기도 한다. 그림과 음악도 그러하다. 시를 쓰며 그림을 그리는 이향아 시인께 반 고흐는 더 남다르리라 생각된다.

19C 후반 네덜란드 화가로 자화상, 해바라기, 별이 빛나는 밤에, 등 이루 다 열거할 수 없는 명작들을 많이 그렸다. 고갱을 기다리며 그린 아를의 여인은 알퐁스도데에게 소설을, 비제에게 작곡을 하게 했다.

특히 많은 예술가의 마음을 흔들어 논 고흐의 그림에 자주 그려진 사이프러스는 땅에 꽂아놓기만 하면 위로 자라 빽빽하게 울타리가 된다. 죽음과 슬픔의 상징의 음침한 사이프러스. 비극의 여신 멜포메네도의 왕관, 이집트의 미라, 예수님이 못 박힌 십자가도 사이프러스 나무다.

강인한 생명력을 가진 나무, 사이프러스가 그려진 고흐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지상의 물과 빛과 바람소리들이 들린다. 아마 고흐는 이러한 빛의 소리들, 물과 나무의 소리에 귀가 멀 지경이었을 것이다. 너무나 화려하고 현란하고 황홀하였을 것이다. 보는 것만으로 다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한 소리들은 고흐의 화폭에서 생생하게 느껴진다. 고흐의 채색되지 않은 흑백의 섬세한 선만으로 그려진 작품을 바라보면 소리의 소용돌이는 더 크게 다가온다. 비록 찰라 적이긴 하지만 정신을 빼앗기거나 잠깐 미치게 한다. 귀를 자른 그림 중독 화가, 우리 곁에 오래오래 사는 화가, 고흐는 사이프러스 나무를 닮았다.

정옥임 시인|master@thegolftimes.co.kr
< 저작권자 © 골프타임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정옥임 시인
1996년 ‘문학21’로 등단, 황진이문학상 등 다수의 문학상을 수상했다. 현대시 영문번역에 남다른 열정을 쏟아온 시인은 ‘시 읽는 사회를 위하여 나는 시를 읽고 시를 쓴다’ 등 시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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