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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국 4千字 소설 제5화] 역마살 연인

기사승인 2017.07.25  08:3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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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번 더 괜찮은 남자와 살까 봐요

[골프타임즈=정병국 작가] 그녀가 한국에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결혼을 약속했던 그녀, 서미란은 드넓은 미국 땅 어딘가에서 한국 사람이 아닌 멋진 외국 남자와 살고 있어야 했다. 남대문시장의 먹자골목에서 선 채로 잔치국수를 먹다니 믿을 수 없는 목격이었다.

돼지머리 고기에 소주 한잔 하려던 마음을 바꿔 그녀 곁에 나란히 서며 잔치국수를 시켰다. 그녀는 아주 천천히 국수를 먹었다. 뭐랄까? 배가 고파 먹기는 먹는데 영 입맛이 당기지 않는 젓가락질이었다.

“맛이 없어?”

말없이 국수를 먹다가 불쑥 물었다. 젓가락질을 멈춘 그녀가 고개를 끄떡였다. 결혼 약속을 했던 옛 남자와 뜻하지 않은 만남에 그녀는 조금도 당황하거나 놀라지 않았다. 두루마리 휴지로 입술 주위를 닦아내더니 국숫값을 내 것까지 계산했다.

“차 한잔할래요?”

그녀는 내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앞장서더니 익숙하게 남대문시장을 빠져나가 커피숍으로 들어갔다. 간판만 커피숍이지, 옛날의 다방 분위기였다.

“블랙이죠? 연하게.”

“그걸 기억해?”

“그럼요. 겨우 십 년인데.”

십 년?

그새 세월이 그렇게 흘렀나. 그녀가 표정 없이 말하는 십 년 전의 그 날, 갑자기 연락되지 않아 집을 찾아갔다. 결혼 약속은 했지만, 양가에 알리지 않았으므로 조심스럽게 찾아온 까닭을 이야기하자 장인어른이 될 뻔 했던 그녀의 아버지가 한숨부터 쉬었다. 당신의 딸을 미친년이라고 서슴없이 욕한 그녀의 아버지는 민망한 얼굴로 사과하며 다른 처자를 찾아보라고 했다.

-부모도 감쪽같이 속이고 이민 갔네. 미국으로.

그날, 고개를 숙인 채 한참 동안 앉아 있다가 집을 나왔을 때 하늘에는 유난히 별이 총총했다. 달도 크고 환했다. 별과 달을 쳐다보는 머릿속이 온통 끈적거리는 먹물의 소용돌이로 아무것도 판단할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그녀가 이민 갔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산다는 게 참 재미있어요.”

밑도 끝도 없이 산다는 게 재미있다며 웃는 그녀를 말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다 지나간 일이지만, 결혼하겠다던 사람이 왜 말없이 떠났느냐고 묻고 싶은 가슴을 억눌렀다. 왠지 그녀에게 변명이라도 할 기회를 먼저 주어야 할 것 같았다. 그래도 한때 죽자 살자 사랑했던 여자가 아닌가.

“이렇게 오빠와 해후도 하고. 안 그래요? 오빠!”

미국의 뉴욕 맨해튼 거리에서 마주쳤다면 얼마나 감동적이었을까. 거기였다면 난 오빠의 가슴 속으로 단숨에 뛰어들었을 거예요. 집으로 끌고 가 남편에게 소개도 하고. 세 번째 남편인 늙은 일본 남자는, 아! 그 사람은 화가예요. 미국의 그림 시장에서 슬금슬금 그림 뚜쟁이 짓으로 돈을 챙기는 재주도 뛰어났어요.

“우린 행복했어요. 헤어질 때도 아쉬움의 뜨거운 키스를 할 만큼.”

커피를 마시며 웃는 그녀의 얼굴을 외면했다. 통유리 벽 밖에는 많은 사람이 뒤엉켜 흐르고 있었다. 그들은 엇갈리면서도 부딪치지 않고 제 갈 길을 갔다. 정면으로 마주쳐 멈칫하는 사람들도 없었다. 어린이들이 몰려왔다. 책가방을 멘 녀석들이 갑자기 우르르 뛰어 순식간에 사라졌다. 녀석들이 사라진 쪽으로 목을 길게 뺄 때 그녀가 불렀다.

“오빠!”

남대문시장 먹자골목에서 우연히 만난 이후 처음 그녀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삼십 대 중반의 그녀는 옛날보다 짙은 화장이었다. 조금 튀어나왔다 싶었던 광대가 평평해져 갸름한 얼굴로 바뀌어 있었다.

“그만 봐요. 손 좀 댔어요.”

그녀는 양손 손가락으로 광대를 토닥거리다가 쿡쿡 웃었다.

“두 번째 남편 미국 남자의 작품이에요. 성형외과 의사였거든요.”

그 남자는 죽었어요. 교통사고로. 우리는 목사님 앞에서 단둘만의 결혼식도 하지 않은 그냥 동거였지만, 제법 많은 유산을 받았어요. 사실혼을 인정하고 달러를 안겨준 미국에 처음으로 반했어요. 참 좋은 나라다. 이 나라로 오길 잘했다. 이렇게요.

그녀가 다시 쿡쿡 웃었다.

“그러고 보니 전 정말 운 좋은 여자예요. 세 남편으로부터 받은 돈으로 편하게 살고 있으니.”

네 번째 남편은 어떤 남자일까, 궁금하다는 그녀의 눈길을 외면했다. 지난 십 년 세월을 남의 인생처럼 천연덕스럽게 이야기하는 그녀가 낯설어졌다. 잔치국수를 서서 먹는 모습을 목격하는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부서졌었다. 결혼 약속을 저버리고 훌쩍 이민 간 여자였지만, 그 모습은 아픔으로 밀려왔다. 한순간 묘한 감정에 휩싸였다가 나란히 서서 국수를 먹을 때 국수 가닥이 자꾸만 목에 걸렸다. 결국 그릇을 비우지 못하고 내려놓아야 했다.

차 한잔하자는 그녀의 말을 따른 것은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 왜 서울의 남대문시장에서 국수로 늦은 점심을 때우느냐. 묻고 싶어서였다. 과거의 상처와 분노는 이미 버린 지 오래였다. 우연히 만난 옛 연인의 현실이 어려운 것 같아 작은 도움이라도 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는 재회한 지 한 시간도 안 돼 낯선 여자로 멀어지고 있었다.

“지난달 말까지 오사카에 있었어요. 세 번째 남편 여동생 집에요.”

이혼한 남편의 여동생과 보낸 반년은 가장 지루한 시간이었다며 작은 한숨을 쉬었다. 여동생은 한때 큰오빠의 아내였던, 자신보다 열 살이나 아래인 나를 친자매처럼 아껴 오히려 불편했어요. 몇 차례 살그머니 빠져나가 남자들을 만났더니 한국이든 미국이든 돌아가래요. 미안한 마음에 일주일쯤 얌전히 있다가 서울에 왔어요.

“아버지가 췌장암인데 상황이 아주 나빠요.”

십 년 전, 당신 딸을 미친년이라고 했던 그분은 건강했다. 팔십 넘어서까지 거뜬히 농사일할 수 있을 만큼 건장한 체구였다.

“오빠!”

그녀가 조금은 슬픈 표정으로 불렀다.

“다음 주 월요일에 뉴욕으로 돌아가요.”

오늘이 목요일이니까 나흘 후였다.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도망갈래요.”

이번에도 이민 갈 때처럼 가족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떠날 거라며 웃었다. 그녀의 소리 없는 웃음을 외면했다. 통유리 벽 밖은 한여름의 열기로 이글거렸다. 화려한 꽃무늬 양산으로 뜨거운 햇볕을 가린 할머니의 걸음을 따라갔다. 할머니는 아주 천천히 걸어가다가 허리를 폈다. 허리를 주먹으로 몇 번 치더니 다시 걷기 시작했다.

“나 못된 여자죠?”

고개를 끄떡였다. 못된 여자가 아니라 나쁜 여자였다.

“더는 아버지의 고통을 지켜볼 수가 없어요.”

그녀의 눈길을 맞받았다.

“살아계신 아버지 모습만 기억하고 싶어요.”

그녀가 커피를 더 마셔야겠다며 일어섰다. 리플하지 않고 새 커피 한 잔을 가져와 내 빈 종이컵에 반쯤 따랐다. 두 손으로 종이컵을 감쌌다. 한여름인데도 종이컵에서 전해져오는 뜨거움이 싫지 않았다. 그만 일어서려던 마음을 커피 향으로 달래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어머니와 동생들은 내가 한국으로 돌아온 줄 알아요.”

그럴까? 역이민 올까? 못 올 것도 없잖아. 그러면서도 썩 내키지 않아요. 차라리 영어권의 다른 나라에 가서 한 번 더 괜찮은 남자와 살까 봐요. 한 곳에서 한 남자와 백년해로하지 못하는 이것도 역마살 팔자 맞죠?

“대답 좀 해. 오빠!”

지금까지 딱 두 마디 했다며 눈을 흘겼다. 맛이 없어? 그걸 기억해? 이 말 외에는 말할 줄 모르느냐며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가 코웃음 쳤다.

“하긴 내게 무슨 말을 하고 싶겠어. 거리에다 내동댕이쳐도 속이 풀리지 않을 텐데.”

그녀의 말대로 정말 그럴까? 아니었다. 사랑을 배신당한 옛날의 상처와 분노가 되살아난 것은 사실이지만, 그보다 더 빠르게 밀려온 것은 그녀가 왜 남대문시장에 있느냐는 의문이었다. 부모와 형제자매를 보기 위해 잠시 귀국한 건가, 라고 좋게 해석하면서도 의문이 해소되지 않았다. 그 궁금증을 풀기 위해 그녀와 나란히 서서 잔치국수를 먹었고, 커피숍까지 따라왔다.

“나도 오빠랑 결혼하고 싶었어. 그런데 그게 묘하게 꼬였어요.”

오빠를 만나기 전부터 미국으로 이민 가려고 절차를 밟았었는데 재수 좋게 길이 열렸어. 얼마나 꿈같았던지 몰라요. 그리고 정신 차려보니 내가 뉴욕의 맨해튼 거리를 걷고 있더라고요. 오빠가 아닌 키 큰 미국 애랑.

“나 웃기죠?”

고개를 저었다. 그냥 이 땅에서 살자. 딸이든 아들이든 둘쯤 낳아 기르며 살자. 말하고 싶은데 그 말은 그녀에게 해서는 안 될 아픔으로 밀려왔다.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살짝 흔드는 그녀에게 처음으로 웃어 보였다.

“미국, 잘 들어가.”

정병국 작가|master@thegolf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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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정병국
도서출판 ‘지식과사람들’ 대표와 문예계간 ‘시와 수상문학’ 발행인. ‘문예창작아카데미’와 스마트폰 전자책문학 ‘파란풍경마을’을 운영하며 월간 현대양계에 콩트를 연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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